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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도 지쳐 있을지 몰라서

by 잎새달 이레

초여름에도

무기력은 찾아온다.


푸른 날에,

바람이 유리창을 닦아주는 오후에도

아무 일 없는 얼굴로,

내 안 어딘가를 조용히 적시며 찾아온다.


나는 햇빛에도 젖어,

먹구름 아래서도 웅크리며

계절은 아무 죄가 없는데

마음은 늘 먼저 무너져버린다.


자꾸만

존재에 대해 묻게 된다.

나는 왜 여기 있는지,

무엇을 위해 깨어 있는지.

무얼 바라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바라지 못한 채.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뭔가 남았을 줄 알았는데

그저 걷기만 했다는 사실만 남아 있는 게.


그리운 얼굴들이 있고

다시 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계속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는 것 또한.


아무 일 아닌 말 한마디가

자꾸 지금을 흔들고

지나간 계절이

오늘을 늦게 데려온다.


그러니까,

나는 그 모든 기억을 끌어안고도

그저 그런 사람이다.

그저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는

더 이상 확신이 없는데

그래도 가야만 한다는 마음 하나가

계속 등을 민다.


언제가 자신 있었나

스스로에게 묻다가

대답 없는 마음만 더 무거워진다.


무엇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고

무엇을 좋아했는지도 잊었고

무엇이 이토록 괴로운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도 글도 다 망설이게 되는 오늘.


우울에 깨어 있고

불안에 눈뜨고

잠은 마음의 가장자리에만 달라붙고

몸은 자꾸 이불속으로 기운다.


그래서 오늘은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두기로 한다.


그렇게 하루가 또,

덧칠되듯

기억도 아닌 기억으로 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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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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