深海
"오늘은 날씨가 맑아서 버거워요."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상담실 한 귀퉁이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는 무심한 듯 내뱉었지만 그 말은 가볍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나는 말보다 침묵을 먼저 배웠다.
늘 어디쯤 가라앉아 있던 우울, 부끄러움과 닮은 낮은 자존감,
내 그림자보다 먼저 따라오는 부정적인 말들.
그렇게 만들었던 부모님은 구태여 그 무게를 어떻게든 꺼내보고자
부담스러울 만큼 밝은 상담실로 나를 데려갔다.
나는 그곳에 ‘끌려온’ 사람이었고,
빛이 나를 치유하기를 기대하는, 너무 눈부셔서 낯선 곳.
하지만 나는 그때 알게 됐다.
빛은 모든 걸 고치지 못한다는 걸.
때론 그림자를 더 또렷하게 만들 뿐이라는 걸.
매주 화요일 아침 10시,
겨우 어스름한 새벽에 잠들던 내가
억지로 맞추어야 했던 낯선 리듬.
숙제 같던 시간.
특히 장마철이면 더 깊숙이 어둠에 잠겨,
그곳에 나를 숨겼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난히도 밝은 아침이었다.
비는 멈췄고
세상은 너무 깨끗했다.
나는 그 맑음 속에서
도리어 발각된 기분이 들었다.
상담실은 우유를 부은 듯 환하게 밝았다.
익숙한 검은 옷을 입은 나는 색연필보다 더 흐린 기분을 꺼내야 했다.
감정 다섯 개를 써 내려가는 종이 앞에서 나는 마지막 하나를 망설였다.
쓰고 싶지 않았지만 침묵은 또 다른 외면이니까.
그래서 적었다.
"두려움, 내지는 버거움."
상담사 선생님은 내가 쓴 감정들을 한 글자씩 읽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이 감정은 언제, 왜 느꼈나요?”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평소에는 날씨가 어두워서,
밖에 있어도 제가 잘 보이지 않잖아요. 우산 아래 숨어서,
그림자 속에 있으면 그래도 견딜 수 있어요.
그런데 오늘은 날이 너무 맑아서 제가 너무 잘 보여요.
그게 초라하고, 그래서 두렵고, 버거워요.”
나는 덤덤했지만 선생님의 표정이 꽤나 안타까워 보였다.
'연민'이라는 단어의 의인화처럼.
“이렇게 예쁜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마음이 아프네요.”
상담사와 내담자 간의 목소리가 아니라 엄마 같은 따뜻한 말이었다.
난 그저 그 말에 머물렀고
돌아가는 길도 날씨는 여전히 맑았다.
슬픈 노래를 이어폰에 틀어 넣고 햇살 속을 걸었다.
가능한 한 빠르게,
사람들의 시선보다
햇빛보다
내 안의 어떤 것들보다
먼저 집에 닿기 위해.
내 방에 들어서자마자
커튼을 닫았다.
나는 그 어둠 속에서
오히려 편안해졌다.
빛이 없는 방,
질문하지 않는 공간,
나를 조용히 감싸 안는 검은 무게.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날 밤, 그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빛이 두려운 사람’이라는 말.
혹시 이 무게는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빛 속에서 드러나는 나 자신이 두려워서 오는 건 아닐까.
깊은 바닷속은 햇빛이 닿지 않는다.
어둠은 언제나 나를 감싸 안았고,
나는 그 어둠 속에서만
나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아직도
심해를 떠도는 중일지도 모른다.
햇살이 미치지 않는 바닥에서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그리고 간신히 살아내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내 모든 그림자에
이름을 붙이고,
침묵에도 언어를 얹게 되면
이 무게는
부담도,
두려움도 아닌,
삶이라 불릴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다시 떠오를 수 있을까.
빛으로부터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내 안의 빛을
알아봐 주어서.
나는 그때,
비로소 심해를 떠나
수면 위로,
내 이름을 꺼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