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기를 배워야 한다.
2주 전 월요일은 우리 조직의 VP들에게 지난 분기의 실적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내가 속한 조직은 오토데스크의 플랫폼 사업분야를 관장히며 다양한 산업분야 프로덕트들의 테니컬한 기초역량을 제공한다. 매 분기별로 진행되는 이 미팅에서는 보통 시니어급 프로덕트 매니저들이 플랫폼에서 자신이 맡은 분야에 대해 보고를 한다. 시간 반짜리 미팅에 각자 맡은 시간은 8분.
내가 하는 일은 비주얼라이제이션이라는 분야에서 고객과 우리 회사에 도움이 되는 지점을 찾고, 장단기별 방향과 개발 목표를 설정하며 로드맵을 만드는 것이다. 고객들, 팀원들, 사내 관계자들에게 개발상황을 보고 하고 피드백을 받으며 제품의 성공지표와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는 일. 이렇게 말하니 꽤 근사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내게는 아직 힘들고 고된 분야이다. 위에서, 옆에서, 사방에서 요구하는 게 많고, 제품을 만들지는 않지만 나름 책임지는 자리이기 때문에, 욕먹기 아주 쉬운 자리이다. 대충 뒤에서 묻어가기 힘든, 너무 쉽게 눈에 띄어 일을 못하면 잘리기 아주 쉬운 자리이다.
가까스로 슬라이드 4장을 만들었다. 비주얼라이제이션이란 무엇인가? 이번 연도에 잡은 목표들의 진행상황은 어떠한가? 잘 진행이 되지 않는 목표, 그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정확한 데이터도 준비되지 않았고, 무사히만 넘어가면 다행인 상황이 되어 버렸다. 마음은 무거웠지만, 더 이상 잡고 있어도 뭔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일요일에 다시 생각하자 하고 컴퓨터를 껐다. 주말이지 않은가?
다음날은 교회 친구들과 집에서 교회 친구의 생일 파티를 하는 날. 팜 스프링스로 곧 이사 간다는 친구, 그녀의 생일 겸 모여 별별 수다를 늘어놓는다. 이민자로서 느끼는 삶의 회한과 즐거움이 범벅이 되어 같이 모이면 폭발적으로 웃고, 다독이고, 놀고 한다. 파티가 끝나고 치우고 나니 새벽 2시. 그대로 자는 건 어찌 아쉬워 넷플릭스로 요즘 보는 드라마를 본다. 박보검, 박소담이 나오는 청춘기록. 한참 전 드라마이긴 하지만, 젊은 청춘들의 풋풋한 사랑과 애환이 신선했다. 발표에 대한 부담을 그나마 누를 수 있는 산뜻한 토요일이었다.
그 주 일요일 오후에는, 동네 도서관에서 발표준비를 했다. 8분의 시간, 짧지고 길지도 않지만 인상을 남기는 데는 충반한 시간이다. 프로덕트 매니저들에게 발표를 잘하는 것은 너무 중요한 일이다. 게다가 VP들에게 하는 업데이트이기에 리스크가 큰 발표이다. 일단, 적어보기로 했다. 8분을 채추려니 한 1000자 정도의 내용이 필요했다. 일단 적는 것을 끝내고 연습은 저녁에 하자 맘먹는다.
발표를 앞두고 있을 때면, 길든 짧든 늘 마음이 무겁다. 실패할까 봐 두렵지만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이런 두려운 마음을 정리하고 누르는 데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 결국 이렇게 글로 정리하는 데 드는 시간은 2시간 정도. 그 마음을 정리하는 데 드는 시간은 forever...
그다음 날 발표는 그야말로 맹맹하게 끝났다. 일요일 밤 발표 연습을 하고자 했으나 결국 그냥 일찍 자버렸다. 부담감에 휩싸여 머릿속에 남은 공간이 없었다. 피할 수는 없었기에, 새벽에 일어나서 스토리 라인을 잡아보고 그날 아침 10시경 발표를 끝냈다. 우리 조직의 SVP는 내 파트가 끝나고 아주 건조하고 실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업데이트는 고객 데이터로 실적과 리스크를 보고해야 한다고. 일단 끝났다는 데 의의를 두었지만, 마음은 찝찝했다. 내 상사가 그 미팅에 있었는데 또 한소리 듣겠구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1:1 미팅을 하며, 내 상사는 내게 물었다. 그 발표가 어땠냐고. 데이터가 없어 맹맹한 발표였다고 시큰둥하게 말했더니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나? 자기도 그렇게 느꼈다면서. 실은 한국에서 2주 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오고 나니, 난데없이 이 발표를 내가 해야 한다고 했다.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5일. 다른 할일도 많은데, 데이터도 준비되어 있지 않고, 내게 미리 얘기를 해준 것도 아니다. 내가 하기 힘들 것 같다고 했더니, 그냥 대충 하라고 하더니, 결국 끝나고 나니 내게 핀잔을 준다. 워낙에 그 발표는 내 이전 상사가 하던 일이었는데, 그가 회사를 떠나면서 결국 나한테 돌아온 것이다. 억울하고 나름 할 말은 많았지만, 그냥 받아들이고 다음 발표에는 고객 데이터를 준비하겠다고 하면서 끝냈다.
"내가 이 나이에...." 이런 표현을 많이 하기도 듣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면 꼰대처럼 들릴 수도 있겠으나 확실히 10년 전의 나와 비교해 봤을 때, 내 커리어에 대한 야망과 회사에 대한 충성도는 예전같이 않다. 앞으로 치고 나가기에 바빴고 어떻게 해서는 원하는 걸 얻어내려고 했던 나였기에 그나마 지금의 내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때, 나는 커리어 개발이 더 중요했고 월급은 그저 따라오는 부산물 정도로 생각했다. 은퇴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되는 요즘, 나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이 부쩍 늘었다.
프로덕트 매니저라는 직업은 매력적이고 만족도가 클 수 있는 분야이지만, 스트레스가 많고 시간투자를 많이 해야 한다. 고객들과 윗분들에게 끊임없이 채찍질을 당할 때도 긍정적으로 돌리고, 그다음을 늘 생각해야 한다. 물론, 고객들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성과를 낼 때, 새로운 분야를 야금야금 알아갈 때, 똑똑하기 그지없는 팀원들과 생각과 마음을 공유할 때, 그때 느끼는 만족감과 자기 효능감은 내가 기존에 했던 어떤 일과도 비교되지 않는다. 그러나 상황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 내 능력에 부족함을 느낄 때, 내가 표적이 되었을 때, 그럴 때는 내 나이에 대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언제쯤이면 자신감 있게 일을 할 수 있을까? 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도 아닌데 내 경쟁력은 뭘까?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특히 상사의 부정적인 피드백을 들을 때면, 이런 고민들이 내 마음을 더 괴롭힌다. 네가 프로덕트 매니저로서 회사와 고객에 미치는 가치를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너네 팀은 의사 결정을 어떻게 하냐? 너의 공헌도는 뭐냐? 문서작성은 제대로 하고 있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뜬구름 잡는 피드백들은 사기진작은커녕, 사기 저하의 원인이 된다. 내가 좀 더 어렸다면 더 긍정적이고 진취적으로 그의 피드백을 받아들이고 고치려고 했을까? 그 이전의 상사가 떠난 지 2개월, 여전히 이 상사와의 관계가 애매하다. 그냥 너무 잘하려고 무리하지 않으면서, 담담하고 건조하게 관계를 꾸려가기로 맘먹는다. 이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결국 내 일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관건이 될 것 같다.
인생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은퇴에 대한 고민이 구체화되고 있는 50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금은 그저 내려놓기에 익숙해지려고 한다. 몸도 마음도 현격히 달라진 이 시기, 스트레스는 건강에 최악. 이 시절의 독특함을 인정하고 이전과는 다른 방법들을 모색해야 한다. 나는 나이고, 일은 인생의 일부일 뿐이다. Autodesk라는 소속감을 내려놔야 할 때 그 상실감에 너무 충격받지 않아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상황이 펼쳐질까? 조급하지 않고 하루하루 살다 보면 어찌 됐든 결론은 내려지겠지.
빨리 60이 되고 싶다고 농담처럼 친구들에게 말하곤 하다. 앞으로 남은 50대, 명확하지 않아서 기대해 볼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