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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현숙 Sep 14. 2024

Willy Wonka Jr.

연극반 캐스팅

유권이가 동네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날을 기억한다. 집에서 걸어서 3분 거리, 동네에 있는 학교버스 정류장이 들썩거렸다. 난생처음 책가방을 맨 동네 아이들, 그 아이들을 지켜보는 부모님들 사이에서 내 손을 꼭 잡은 유권이를 보는 내 마음은 불안 반, 흥분 반. 버스가 오고 유권이는 무사히 친구들과 버스를 타고 첫 등교를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고는 학교는 다시는 안 가겠다고 선생님께 선전포고를 하고 으름장을 놓던 유권이는 다행히도 학교생활에 무리 없이 적응하는 것 같았다.


1학년 겨울에는 학교에 큰 행사가 있었는데, 학생들의 연극공연이었다. Wizard of Oz라는 연극이었는데, 고학년들이 도로시, 허수아비, 겁쟁이 사자, 양철나무꾼 같은 주요 인물을 맡고, 저학년 아이들은 주로 앙상블역할을 맡았다. 유권이는 그 연극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학교에서 두 번의 공연이 있었는데, 유권이는 이틀 내내 공연을 보고는 너무 즐거워했다. 자기도 나중에 연극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던 중, 코비드가 터졌고, 학교가 정상화되었을 때, 유권이는 거의 4학년이 되어 있었다.


나의 어렸을 적 로망은 뮤지컬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춤과 노래를 즐겨하던 나에게 뮤지컬은 꿈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내가 이룰 수 없었던 꿈, 유권이가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년에 5학년을 시작하며, 유권이는 연극반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유권이랑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죄다 연극반에 들어갔다. 이번 작품은 Peter Pan Jr.


연극반 활동의 시작은 오디션이었다. 원하는 역할을 선택하고 역할마다 주어진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는데, 유권이는 놀랍게도 Peter Pan이 되겠다는 야심을 보였다. "I'm flying"이라는 노래로, 피터팬이 하늘을 날아오르며 피터팬 특유의 허영기와 치기 어린 모습을  보여주는 노래였다. 유권이는 정말 노래 연습을 열심히 했다. 나도 질세라 피아노로 음정을 잡고, 발음과 감정, 몸짓까지 훈수를 두며 도왔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데 Peter Pan은 못돼도 뭔가 비중 있는 역할은 하나 맡겠지 싶었다. 오디션이 끝나고 유권이는 의기양양해 보였다. 기대해도 되겠구나.


그다음 주 이멜로 캐스팅 결과가 왔을 때, 나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Peter Pan이 사는 Neverland에 사는 소년들 중 Toodles라는 인물이었는데, 스크립트로 세어보니 대사가 고작 3-4줄. 그토록 열심히 오디션에 참여한 유권이가 안쓰럽게 느껴졌고, 이런 역할을 준 디렉터에게 화가 났다. 너무한 거 아닌가? 알고 보니, 피터팬 역할은 정말 머리가 바비인형처럼 노랗고 눈이 파란 백인아이에게 돌아갔다. 이거 인종차별 아냐?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내 마음, 어찌 풀어야 하나?


유권이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며칠이 지나고도 내 마음은 풀리지 않았으나 신기하게도 유권이는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연극반 활동은 여전히 재미있고 피터팬이 아니어도 된다며 쉽게 털어버리는 유권이가 기특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요동쳤다. 고민 끝에 디렉터에 전화를 하기로 했다. 왜 유권이가 주요 역할을 맡지 못했냐고 따진다면 싸우자는 이야기가 되는 거고, 나는 그저 유권이가 오디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피력하기로 했다.


수잔 젤린스키라는 학교 연극반 디렉터는 뮤지컬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서 배우로 은퇴를 한 후에, 동네 학교들에서 여러 뮤지컬을 디렉팅 하는 예술가다. 나이가 50대 중후반은 되어 보였지만, 여전히 예쁘고 날씬해서 연예인 같은 느낌을 물씬 풍겼다. 다행히도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이 여자 괜찮은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녀는 디렉터로서 캐스팅이 얼마나 힘든지로 말문을 열었고, 나는 내 감정을 적당히 추스르며 최대한 친절하고 호의적인 태도로 대화를 이어갔다. 유권이가 얼마나 오디션을 열심히 준비했는지 왜 유권이가 피터팬이 되고 싶어 했는지 그녀에게 설명했다. 유권이는 많은 대사를 외우고 연습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그 마음이 기특했다. 수잔은 엄마로서의 내 마음을 이해하는 듯 했고, 유권이가 오디션도 잘했고 성실한 아이라며 다음 작품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통화를 끝내면서 내 마음은 제 자리를 찾았고, 무엇보다 유권이에 대한 PR을 잘한 것 같아서 흐뭇했다. 힘 빼고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 역시 오해를 푸는 최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올해 유권이가 중학교에 가면서 방과 후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친구 엄마가 수잔이 올 가을에도 연극을 하는데 초등학생뿐만 아니라 중학교 1학년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유권이는 축구와 연극반을 두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 연극을 하기로 했다. 이번 작품은 Willy Wonka Jr. 티모시 샬로메가 나온 최근영화 Wonka가 아니라, 진 와일더라는 배우가 나오는 오리지널 작품, Willy Wonka and the chocolate factory를 아이들에게 맞게 각색한 작품이었다.


지난주 화요일, 학교에서 돌아온 유권이는 목요일에 연극반 오디션이 있고, 자기는 Wonka 오디션을 보겠다고 했다. 요놈 봐라, 패기 한번 좋네. 유권이는 끼가 줄줄 흐르는 백인 아이들에 비해 연극, 춤, 노래 기량이 그다지 출중하지는 않았고 너무 창피하지만 않은 역할 정도면 충분하다 싶었다. "Pure Imagination"이라는 노래가 Wonka역할의 오디션이었다. 유권이가 컴퓨터 게임을 너무 해서 눈이 반은 잠긴 상태로 노래를 연습을 하는데, 정말 가관이었다. 이래서 무슨 오디션을 하겠다고. 다음날 엄마 집에 와서 연습을 하겠냐고 했더니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다음날은 아빠한테 가는 날이었고, 전 남편 집에는 피아노도 없다. 옆에서 도와주고 싶었으나 그냥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요즘 유독 내가 간섭하는 것을 싫어해서 내가 설쳤다간 괜히 애랑 싸우기만 할 것 같았다.


유권이는 오디션 이후에 계속 아빠 집에 있어서 오디션이 어땠는지 물을 기회도 없었다. 며칠 후, 일요일에 느지막이 일어나 수잔에게 온 캐스팅 이멜을 열었다. 순간 내 얼굴을 타고 내리는 뜨거운 눈물 한줄기. Wonka 역할이 유권이게 오다니!!! 이런 선물이 또 어디 있을까? 당장 수잔에게 달려가 밥이라도 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권이는 Wonka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까? 상상만으로도 콩닥콩닥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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