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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드 Aug 19. 2024

무심함. 매정함.

2024.08.19

  요 며칠은 내내 상업소설을 읽었다. 사건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워커홀릭들의 로맨스물이었는데, 같은 작가가 쓴 작품을 연달아 여럿 읽다 보니 그 인물이 그 인물 같았다. 클리셰란 이런 거지. 익숙하고, 다 똑같은 것 같은데도 계속 보게 되는 것. 나는 자가복제를 옹호하는 쪽이다. 시쳇말로 도파민 중독이 딱 이런 건지, 잠이 오지 않아서 이틀에 한 번 꼴로 자며 소설만 읽었다. 가끔은 밥을 먹었고 그보다 더 가끔 실내자전거를 굴렸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이러다 버릇이 되면 어떡하나 싶을 만큼 활자만 탐닉하다가도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면 당장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어떠한 소설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취미가 되지 못한 채 잊혀진 수많은 탐닉들이 있다. 그러니 빠져들 수 있을 때 마음껏 유영해야 한다. 쉽게 질리고 쉽게 잊으니까. 일상에 권태를 느끼는 일은 현대인에게 가당하다. 남이 쓴 소설을 읽다가 국어사전을 켜는 일이 잦다. 생소한 단어의 의미와 사용 예문들은 뇌리에 아주 잠시 스쳤다가 금세 사라진다. 주변인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지만, 나는 무식한 편이다.

  무심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이제 인정할 때가 됐다. 나는 타인을 쉽사리 지나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 일보다 주는 일이 더 힘들다. 말이 헛나가서 남을 할퀴면, 그 순간 나는 더 깊게 베인다. 오늘은 엄마의 생신이었다. 며칠 전부터 아빠에게 집에 와서 하루 자고 가라는 말을 했다. 가 봐야 할 게 없다는 응수로는 이제 부족하다. 더는 그 집이 내 몸에 편하지 않다는 말에 아빠는 나를 나쁘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나쁘다기보단 슬픈 일이다. 나에게 갈 곳이 없다는 거니까. 설복하기 위해 살짝 아픈 말을 했다. 아빠가 원하는 모습의 딸이 아니라서 못 가. 살 못 빼면 집에 내려오지 말라는 말을 수시로 해댔으니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정답이었다. 하지만 아빠가 멈칫하는 순간, 심장이 조금 아렸다. 손톱자국도 안 남을 만큼 사소하게 남을 할퀴는 건데도 나는 그런 나에게 상처받는다. 미안해서가 아니다. 나는 내가 패악질을 해도 가만히 나를 안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가족 말고. 피 섞인 사람을 제외하고. 하지만 그럴 사람은 없겠지. 사랑은 봉사가 아니다. 가족을 떠올리면 나는 이제 정말,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어딘가 아프거나 마음이 불안할 때면, 남들보다 체온이 높아 언제나 뜨거운 아빠의 손을 자주 떠올린다. 나보다 훨씬 큰 그 손이 나를 감쌀 때 내가 얼마나 안심하는지. 이런 온기를 안다는 건 사랑받았다는 뜻이다. 가족이 아니라면 그건 단순히 타인의 체온일 뿐이 테다. 그럼에도 나는 잘 모르겠다. 부모님은 언제나 억울해한다. 우리가 너한테 무슨 큰 잘못을 했니? 왜 그렇게 공격적이고, 또 방어적이야?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엇갈리는 형태의 사랑을 해왔다. 엄마는 왜, 나라는 인간을 생략하고 엄마의 기준으로 나를 이루는 요소들을 판단해? 최근에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다. 내가 무엇을 선호하는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좋은 것만 내게 강요한다. 이런 형태는...... 언제나 옳지 않다. 우리는 철저한 타인이다.

  어제까지도 올 필요 없다던 엄마는 오늘 오전에서야 집에 와서 하루 자고 가지 않겠냐는 뜻을 넌지시 비췄다. 사실은 집에 갈 생각이었다. 가고 싶어서는 아니고, 마땅히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눈치가 보였다. 뭔가 큰 잘못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적어도 이 정도보단 훨씬 무심한 인간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몸의 붓기를 빼기 위해 걸어서 터미널까지 가 버스를 타고 깜짝 선물처럼 집에 나타날 계획이었다. 이 옷을 입다가, 저 옷을 입다가, 조금이라도 싫은소리를 덜 들을 만한 모습으로 나타나고자 계속 옷을 갈아입다가 도로 벗고 누웠다. 무슨 옷을 입고 가든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겨우 나와 함께 밥을 먹었다는 기분 따위 맞춰주기 위해 도마에 오르는 물고기의 기분으로 집엘 가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나를 존중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려 했다. 나는 지고 들어가길 멈춰야 한다. 잠든 나를 욕하는 말들을 듣고 어버이날 새벽 집밖의 쓰레기통에 몰래 선물을 갖다 버렸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자꾸 떠올랐다. 나는 그들에게 어떠한 성의를 보이기 위해 노력하다가, 그 성의를 몇 마디의 따뜻한 말로 보답받고 싶어 노력하다가, 체념하고 그것을 버리길 반복해왔다. 그러니까, 그들에겐 난 성의가 없는 인간이었다. 성의를 보일 시도 자체를 안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체념에 앞선 체념. 거절 앞에는 미리라는 개념이 붙을 수가 없어서, 나는 미리 거절당하고도 그렇다고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대신 후에 타박당했다. 이건 불행이 아니다. 불행과는 다르다. 그냥, 조금 서럽고 말 일이다.

  네 이야길 하고 있었어. 우린 항상 네 생각을 해. 너 없어서 외식을 안 해. 그런 말들이 어떤 날엔 사랑의 표현 같다가 어떤 날엔 내 숨을 옥죄는 목줄 같다. 복에 겨운 이야기다. 다정함이란 개념에 대한 정의가 쌓였다가 무너지길 반복하고 있다. 나는 다정한가. 우리는 다정한가. 당신들은 내게 다정한가? 나는 정이 많다. 잔정 세정 그냥 정. 정이 많다. 사랑도 많다, 고 줄곧 생각해왔다. 그렇다면 내 결핍은 무엇인가. 나는 무심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언젠가 엄마는 집 옆에 차를 대고 내려 나와 함께 걷다가, 연립주택마다 하나씩 있던 입주민용 쓰레기통 옆을 지나칠 쯤 말한 적 있다. 매정한 년. 왜였을까. 기억이 안 난다. 나는 오늘도 아마 그녀에게 매정한 년이었을 것이다. 무심한 사람이 되고 싶었더라면 더 무심히 행동했어야 했다. 너무 오래 나를 휘두르게 둔 터라 이젠 어떻게 스스로 움직여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오래전 상담 때 의사가 했던 말이 나를 스친다. 말해야 해요. '그래서? 당신이 그런데 나보고 뭐 어쩌라고?' 그렇게 말하셔야 해요.

  모른다. 그래. 나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모든 것이 멈췄으면 좋겠다. 삶의 모든 것. 생의 모든 것. 지구의 모든 것. 우리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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