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2
너무 오래 책을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 관심이 가득했는데. 펼쳐보지 않더라도 자꾸만 사고 싶었는데. 문득 책을 사모으기만 하는 행위가 무척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고 사물로 가득한 내 방을 둘러보았고 나는 그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잠만 잔다. 감정을 조절하는 약을 오래 먹었다. 먹기를 그만두었다. 중단하였다. 모두가 약을 미워한다. 약이 날 살리는 줄도 모르고. 허허실실하는 내 멱살을 잡아다 시간과 일정한 속도로 끌어 당겨 주는 줄도 모르고.
감정의 진폭이 늘었다.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늘어난 건 마이너스의 감정들뿐이다. 화가 늘었고 자기혐오가 늘었다. 입을 열면 말이 곱게 나가지 않을 것 같아 씹어삼키길 반복한다. 누가 내게 부당하건 주제넘건 내가 지금 마이너스의 인간이라 그렇게 판단하는 건지 확신할 수 없어서 일단 다 참는다. 바보가 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선, 지금이 더 사람 같다. 감정이 잘 조절될 때의 나는 인형 같았다. 너무 잘 웃었다. 말을 삼켜서 그런가? 주에 한두 번은 속을 게워내곤 한다. 뭘 먹어서, 먹지 않아서 속이 뒤집힌다. 스트레스 때문일까. 살을 빼라고 종용하는 사람들 때문일까. 먹었다는 사실 자체로 위장이 꼬이는 건지 잘못 먹어서 꼬이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내 마음이 그대로라는데 사람들은 내게 험한 말을 쏟아내면 새로운 마음을 먹는 줄 안다. 먹은 줄 안다. 그걸 토하는 거네. 남들이 내가 직접 삼킨 줄 알고 억지로 떠먹이는 마음들을 토하는 거네. 영영 깨워지지 않는 잠자는 숲속의 아무개가 되고 싶다. 하지만 무기력함이 는 것 같지는 않다. 이전보다 미세하게, 활동적이다. 나는 사소한 변화를 높이 산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변하는 인간을 좋아한다. 나는 그런 인간 무서운데.
최근의 나는 길을 잃은 사람 같다. 그보다는 길을 잃은 걸 알면서도 길을 찾지 않는 사람 같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주저앉아버린 사람 같다. 하지만 언제는 아니었나. 나는 한 번도 앞을 향해 걸어본 적 없는 사람. 멍청한 사람. 엄마는 꾸준히 내가 약해 빠졌다고 했고, 멍청하다고 했다. 말은 무거운 족쇄다. 나는 내가 강한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자꾸 약해빠졌다는 말을 듣다 보면 멍청해진다. 엄마의 상처는 내 상처가 아니다. 엄마는 그걸 모르는 것 같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상처받을 것이 두렵다며 나를 가두려 한다. 같은 상황이어도 엄마가 받을 상처와 내가 받을 상처는 다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다. 엄마는 그걸 모른다. 우리의 약점은 다르다. 그것도 모른다. 울컥울컥 치미는 감정들을 글로 쏟아내게 되는 때가 있다. 한때는 자주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아주 오랜만이다. 내가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보여지는 것에 익숙하고 싶고 나를 읽히고 싶다. 엄마는 언제나 내게 가면을 쓰라고 한다. 가면을 벗는 순간 모두가 공격할 거라고. 나는 누군가의 공격보다 내가 써야 할 가면이 더 아프다.
글을 쓰다 보면 차분해진다. 냉정해지는 건가? 막 쏟아붓질 못하고 단어와 단어 사이를, 문장과 문장 사이를, 호흡을 생각하게 된다. 달궈진 프라이팬에 물을 뿌린 것처럼 이리저리 튄 후 빠르게 말라버린다. 그러고 나면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다.
그래도 처음 쓰려던 건 적고 끝내야지. 내가 보내는 시간들이 너무 무의미해서, 책이라도 읽어 보자고 펼쳤다. 책을 읽어야지 싶을 때 자주 펼치는 책이다.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 이응준 산문집이다. 나는 이 사람이 너무 진득한 우울을 서술해서 안 좋아한다. 여기서의 안은 매우 작다. 이 정도면 안 좋아한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런 안이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표시하는 걸 잊어서 초반부를 읽고 또 읽는다. 읽었다는 걸 알아도 그냥 읽는다. 완전하게 기억하는 거 아니잖아. 그럼 모르는 내용인 거지. 초반부에 그런 말이 나온다. 저자가 한 말도 아니다. 들은 말이다. 너는 왜 인생에 불편한 게 없으려고 그러냐. 그 다음에 나온 말은 술 마시지 말거라, 다.
한동안 술을 엄청 마셨다. 이제는 먼 시간이다. 나는 아직도 과거 곳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이 자꾸 흐른다. 내가 어느새 여기 와 있다. 한창 혼자 술 마실 적의 나는 절망도 우울도 뭣도 아닌 늪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늪에서 빠져 나오기가 싫었다. 그냥 매일 취하고 매일 울고 매일 아프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였나. 시간이 시간으로 남지 않아서, 그래서 기억도 남지 않아서 그 날들이 좋았나 보다. 자연스레 술을 끊었는데 이유는 없다. 계기도 없다. 안 마시게 됐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길을 걷다 말고 아무 술집이나 들어가 혼자 술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얼마나 좋아. 아무 생각도 기억도 안 남는 시간들. 나는 내가 살고 싶은 건지 죽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가끔 내 목소리에 놀란다. 내가 말을 한다는 것에 놀란다. 말을 더듬지도 않고 목소리가 작지도 않고 조목조목 사무적이라는 데 놀란다. 소리 내어 하는 대화랄 것을 거의 안 하고 있다. 할 사람이 없다. 단조로운 삶이다. 한 육십 년 말을 하지 않고 살더라도 말할 일만 생기면 멀쩡하게 말할 것 같다. 그게 너무 이상하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잘한다는 게 이상하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어디 갇혀 있고 입이랑 성대는 따로 움직이는 것 같다. 이 글이 우울해 보일까? 내가 불안정해 보일까? 나는 원래도 이런 사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