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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드 Sep 08. 2024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흘렀으면

2024.09.08

  눈에 보이는 불행이란 없는 것 같다. 물론 불행의 요소는 잘 보이겠지. 가난, 폭력, 뭐 그런 것들.

  어제 부모님이 자취방을 보러 오셨다. 어떻게 사는지 감시 경 구경도 하고, 새 이불도 깔아 주고, 함께 밥도 먹고 카페도 가고. 두 사람이 계속해서 꺼냈던 말은 내가 밝아 보인다는 거였다. 전보다 밝아 보여. 전보다 얼굴이 좋아. 전보다 잘 웃어. 간만에 우리 가족이 좋은 모습이었던 것 같다며 엄마는 자고 일어난 오늘까지도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정말 그런가. 어제의 내 상태는 굳이 말하자면 조증의 발현에 가까웠다. 매일 길을 잃은 기분이긴 하지만 요즘은 특히나 혼란스럽다. 나는 이제 어리지도 않은데 여전히 하고픈 건 없고, 해야 할 할 의무를 못 느끼고,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안 보이고, 당장 하루하루 일 분 일 초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를 도무지 모르겠다. 하물며 뭘 먹어야 하고 어떻게 잠들어야 하는지까지도. 어떤 행위에도 감흥이 없고 내내 좋아해왔던 것들에 눈길도 주지 않는다. 내가 스러져가는 것이다.

  그런데 좋아 보인다고. 그건 내가 좋아졌다는 게 아니라, 부모님 눈에 좋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살이 조금 빠졌고, 떠안고 있던 물건들을 버리고 또 버렸다.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두고보자길래 며칠 내내 잠까지 줄여가며 집을 뒤엎었다. 오기 전날에는 그날 먹은 끼니마다 전부 토해냈다. 그러니까 살이 빠질 수밖에. 속이 울렁거려서 밥 먹다 말고 뛰쳐나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눈을 지긋이 감으면 걷다 말고 쓰러질 것 같았다. 안 들키려고 열심히 말하고 웃었다. 훨씬 밝아졌다니 끼고 산 자식 속이라도 전혀 안 보이는 게 맞나 보지.

  내가 이렇게 망가져가고 있는데. 무너진다고 표현할 만큼 쌓인 내가 없어서 그저 조금씩 바람에 쓸려가고 있는데 정말로 내가.

  우습다. 누굴 비웃어야 할까. 나일까, 내가 아닐까. 관성처럼 매일 글을 쓰다가 집 정리에 치중하면서 열정을 놔버렸다. 나는 집중이 아니라 골몰을 하는 사람이다. 하나에 빠지면 주변을 못 보니까. 다시 빠져들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추석까지...... 일주일. 일주일 동안 눈에 들어올 만큼 살을 더 빼 오라고 했다. 깨굶어도 그렇게는 못 뺀다. 겨우 그것도 못 하냐고 말할 때마다 목을 확 졸라버리고 싶어. 단순히 하루 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에너지가 다 빨려나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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