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드 Sep 12. 2024

새 이불 그리고 깨끗한 에어컨

2024.09.12


  오늘은 우울한 글이 아닐 겁니다. 제가 기분이 좋거든요. 이사 문제를 해결했고, 아주 싼 값에 에어컨 내부를 청소했고, 비록 조리를 한 것에 가깝지만 거의 처음으로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냈고, 또 뭐가 있을까…….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지는 게 일상이라 내 신경을 갉아먹는 행거를 대신할 미니 옷장도 하나 주문했습니다. 불편해 죽겠던 향수 장식장도 새로 샀고, 그 위에 먼지 쌓이지 말라고 밥상보까지 준비했는데 그것마저도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좋아요. 나의 불안 요소는 한 가지입니다. 돈. 돈을 너무 막 쓴다는 것. 덮어놓고 소비한다는 것……. 내일부턴 정말 그만 사야지.

  프리즘오브라는 영화 전문 잡지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채워져 있진 않지만 이런 게 있다는 게 어디인가 싶어요. 여름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이었고 가을호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로, 둘 다 내가 아주 사랑하는 영화입니다. 괴물 한정판 표지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급하게 구하려 하니 연간 구독밖에 방법이 없더라고. 그래서 그것도 했어요. 다 안고 죽을 수도 없는 것들인데 왜 꼭 가져야만 속이 풀리는지. 매달리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인 걸까요?

  손목 안쪽에 발라 둔 연고가 노트북에 달라붙어 타자 치는 걸 방해하고 있습니다. 약 이 년 동안 애플워치를 분신처럼 차고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땀띠가 몇 달째 없어지질 않네요. 보기 싫은 흉터가 남을 것 같아요. 피부과를 가야 할지. 나는 피부과에 자주 다니는 사람들이 신기합니다. 다른 병원도 잘 안 가긴 하지만 특히나 피부과는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가게 되는 것 같아요. 더는 내 일상이 못 버틸 만큼 피부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리고 나에게 병원은 아직도 부모님과 함께 가서 증상은 엄마가 설명하고 나는 가만히 아픈 곳만 내보이는 그런 곳 같습니다. 결국 난 나이만 스물다섯 먹은 애새끼인 셈이죠.

  호르몬에 지배당하는 삶이 불편하단 생각을 달마다 해요. 이번 배란기는 정말 이상했습니다. 식욕이 왕성한 걸 넘어 뭐라도 씹어 삼키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고, 모든 욕망이 폭발해서 기억도 안 날 만큼 다양한 것들을 쇼핑했어요. 아픈가 싶을 만큼 오래 잤고, 깨어 있는 시간도 내내 어지러웠습니다. 매번 이렇더라고. 생리 직전에도 잠이 엄청나게 늘고, 나는 내가 아픈 걸까 고민하고, 그러다 보면 몸이 피를 밀어내고, 그제야 나는 아 이게 호르몬 때문이었구나, 합니다. 매달 찾아오는 거면 그리 먼 주기도 아닌데 왜 매번 인식하지 못하는지. 어떠한 최면 따위에 걸리는 기분이에요.

  아무튼, 나는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니. 요즘만 같아선 쓸 글이 계속해서 생겨날 것 같아요. 이미 구상해 둔 글들만 해도 몇 년치는 될 것 같은데, 내가 마음 놓고 글만 쓸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게 될지가 미지수입니다. 아마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가장 최악이자 흔한 엔딩은 현실을 챙기느라 글을 멀리하게 되고, 그렇게 영영 쓰지 못하게 되는 거겠죠. 아니면 아주 나중에 다시 쓰거나. 근데 그 나중은 나한테 아무런 쓸모가 없어. 나는 그때의 내 감성을 믿지 않습니다. 이쯤 와 생각해 보면 나는 젊음을 신봉하는 것 같아요. 이젠 그 신봉 대상에서 내가 빠질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나트륨. 요즘 나트륨이란 단어를 자주 마주쳐요. 나는 나트륨을 왕창 섭취하는 듯하고. 모레 집에 가야 하기 때문에, 내일은 두부만 먹을 작정입니다. 냉장고에 연두부가 네 개 있어요. 낫또는 세 개. 점심 저녁 나눠서 그걸 다 먹으면 되겠다. 나는 두부를 아주 좋아해요. 아빠가 두부를 아주 좋아해요. 그래서 나도 좋아하는 걸까? 무언가를 좋아하게 되는 건 정말 나만의 감각인지, 타인의 모방인지 십 년 정도 고민해 봤는데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흘렀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