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5
현 상황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이렇다. 집에 벌이 들어왔고 나는 또 토했다. 인과관계가 엉망이지만 사실이다.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심심해서 배달앱에 이것저것 담다가 휴대폰을 엎었더니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 간혹 마주치는 손이 미끄러져서 시켰다는 후기들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밥값도 돈인데 결제할 때 비밀번호창까진 아니더라도 주문하시겠습니까? 정도의 말풍선 하나는 띄워 줘야 하는 게 아닌지 의뭉스럽다. 덕분에 먹을 생각 없던 거한 점심을 먹고-오늘의 메뉴는 분식이었다- 남은 음식을 정리할 통을 꺼내려는데 중문 밖으로 벌이 보였다. 마침 벌이 보였고...... 또 마침 배가 부르니 토를 하자 싶었다. 먹자마자 게워내는 행위는 기계적이다. 변기에 몸을 숙이고 검지 끝으로 목구멍을 꾹 누르기만 하면 된다. 본격적인 소화에 들어가기 전의 음식들은 매끄럽다는 인상을 준다. 삼키기 전과 다름없는 질감으로, 내가 씹은 모양새 그대로 다시 나온다. 맛도 그대로라고 하면 너무 더러울까? 요즘 토할 때 드는 생각은 하나다. 음식을 좀 더 꼭꼭 씹는 편이 좋겠다는 것. 숙취로 인해 물 한 방울까지도 억지로 쥐어짜질 때는 고통스럽지만 내 의지로 먹은 것을 뱉어낼 때는 평온하다. 이쯤 되니 나에게 있어 음식을 먹고 토하기까지의 행위가 하나의 스포츠 같다는 생각이 든다. 먹을 때마다 전부 토하면 살이 얼마나 빠질지도 좀 궁금하다. 나는 200년쯤 전에 태어나 '자기 몸에 직접 임상시험을 하는 의사이자 철학자' 정도가 되었어야 했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 가지 않는 것. 집에 가고 싶지 않은 것. 요즘 가족들과의 대화 주제는 대부분이 여기서 출발한다. 가족들은 광양에 오라고 하고, 나는 거절한다. 가족들은 내게 말한다. 네 가족이 이곳에 있고, 네가 아플 때 네 곁에 있어 줄 수 있으며, 우리와 함께라면 너는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모든 명제가 잘못되었다. 사고의 시작점부터 다르다는 걸 알고 나면 상대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진다. 나는 당신들과 함께 있고 싶지 않고, 내가 아플 때 나를 가만히 두었으면 좋겠고, 당신들과 함께할 때 가장 외롭다는 것을 꼭 전달해야만 할까? 끊임없이 이유를 묻는 가족들에게 나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일을 다니지 않는 지금은 언제든지 집에 갈 수 있다. 그럼에도 가지 않는다. 가면 체중계에 올라서야 하니까. 문이 열리자마자 살이 더 찐 것 같네 하나도 안 빠졌네 그런 말들부터 오가니까. 내가 뭘 먹는 것을 마냥 달갑게 생각하지 못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나는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 앞에 나를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가족들과 나란히 걷고 싶지 않다. 실은 나랑 외출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면서 광양에 내려가 봐야 할 게 없다는 내 말엔 같이 어디라도 나가면 되지, 하고 말한다. 가족들의 주장에 따르면 몸무게가 줄어들지 않는 나는 그들을 기만하고 있다. 나를 사랑한다는 가족들은 내 몸을, 나를 쪽팔려한다. 우리는 서로를 기만하고 있다. 최근엔 그런 일도 있었다. 부모님이 제사 때문에 친가에 다녀온다고 하길래 나도 갈까 물었더니(정확히는, 친가가 예쁘게 리모델링을 했다길래 나도 보고 싶다고 했을 뿐이다), 아빠는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너 살 빼면 그때 가자. 가족 단톡방을 훑는다. 최근 이틀의 대화 전문은 이렇다.
8/13
나 : (혈압 기록지)
아빠 : 정상이네. 이제 살만 빼면 되겠다.
8/14
나 : 친구랑 점심 먹기로 했어.
아빠 : 맛있게 조금만 먹어.
엄마 : 먹고 둘이 걸어.
죽고 싶다. 답장이 올 때마다 죽어버리고 싶다.
둘은 무슨 둘. 살 쪄서 쪽팔리게 하는 딸이므로 친구를 만날 때 그 사실을 밝히고 살찐 사람의 마땅한 태도를 갖춰야 하는 나를 위해 함께 구박받으란 뜻일까? 이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중문 밖의 벌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빠는 언제나 말했다. 그런 말을 들어서 화가 나? 기분이 나빠? 그럼 살을 빼면 그만이잖아. 나의 의견은 다르다. 누가 자꾸 기분 나쁘게 해? 그런데 나를 사랑한대? 그럼 죽어버리면 돼. 복수는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