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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신명 Nov 23. 2024

광화문 뒷골목과 사람들

            

 아주 오래전 자주 지나던 길 위에 앉았다. 두 눈 가득 번지는 햇살은 변함없이 녹진한 향기로 스미지만 세종문화회관 광장 너머 모이는 바람의 표정이 낯설다. 광화문 연가가 흘러나온다. 언제 들어도 꾸밈없고 정감 어린 목소리에 애잔한 감성이 녹아든다. 삐걱대는 육중한 나무문과 별 헤는 뒷마당 쪽 작은 쪽문이 있던 한옥, 좁고 긴 골목이 끝나갈 때쯤 아랫목에 고단한 다리를 누이고 여린 손톱마다 봉숭아 꽃물 들이던 내 젊은 시절을 같이 한 집이 있었다. 


 그곳엔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골목마다 서까래 냄새가 그윽했고 열두 대문을 가진 집은 전설로 서 있었다. 아침이면 벽에 걸린 카라얀이 곱슬머리에 눈을 부릅뜬 운명을 지휘했다. 환희의 송가가 곤히 잠든 땅에 입 맞추면 붉은 장미꽃이 만발했다. 거리엔 청춘들이 토끼 눈 비비며 학원 문을 들락거리고 다이아몬드 바늘 즐비한 레코드 가게에선 시대를 말해주는 음악이 고뇌를 접수하며 발길을 잡아끌었다. 새 바늘 매단 날렵한 엘피판에선 살아 숨 쉬는 하루가 흘러나왔다. 빨간 별 깜빡이는 낡은 전축은 카페의 이별을 예감하듯 상심한 눈을 감겨 주고 멜라니 사프카의 The saddest thing 킹 크림슨의 Epitaph가 서둘러 저녁의 문을 닫았다. 


 밤이면 그 골목엔 속눈썹 긴 총각 데생 선생님이 술 취한 조각상을 그리곤 했다. 그 옆엔 나의 푸른 물감이 풋사과를 조금씩 베어 먹고 있었다. 사거리 밝히는 동상도 잠든 새벽, 공중탕 첫 마중물에 젖어들던 꿈처럼 나이는 나이의 주인을 늘 앞서갔다. 별빛은 밤새 문살 사이로 흘러내려 심장에 쩍쩍 붙은 파편을 떼어내던 바람이었다. 그 바람의 땅은 이제 오피스텔 숲속에 낮은 하늘로 저물고 광화문 뒷골목엔 여전히 그때의 얼음알갱이가 발자국마다 박힌다.


 함께 걷던 많은 인연이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낮게 기댄 담장은 허물어지고 우뚝 솟은 빌딩 숲과 넓은 길에는 넘쳐나는 차들로 옛 정취가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새 길은 새 지붕을 만들고 새 지도를 그리며 삶을 이어갈 것이다. 기억 깊은 곳에 존재하는 쓸쓸한 골목길, 검은 고양이 울음소리에 하이힐 종종걸음치던 밤을 지나 세월 바깥 마주 선 내가 보인다. 환히 불 켜진 골목 어귀 꽃집에서 마지막 연인이며 한없는 상실을 소유한* 릴케의 장미를 받아 든다. 시린 계절 이기고 꿈에서 걸어 나온 나는 아직도 장미 한 송이의 가난을 소중하게 음미하는 중이다. 시작과 끝을 한 걸음씩 내어주다 돌아본 시간은 모두가 앞날에 다시 필 청춘이었다.     



* 릴케의 연작시 ‘장미들’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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