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루에 두 번 출근한다. 먼저, 오전에는 남들보다 1시간 일찍 선릉에 있는 회사로 출근해서 정신없이 회의, 보고서 작성 또 회의 보고서 작성을 반복한다. 그 와중에 수시로 울리는 다른 부서나 거래처 전화 응대는 애교 수준이다. 일단 임원과의 회의에 들어가면 모든 전화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회의가 끝나면 부재중 전화나 문자에 일일이 답해야 한다.
점심식사는 특별한 부서 회식이 없는 한 거의 항상 혼자 먹는다. 구내식당 샐러드 패키지를 테이크 아웃 하거나 근처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포장해 온다. 그리고는 노트북 앞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계속 일한다. 두 시간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을 데리러 가려면 어쩔 수 없다. 출근시간 1시간, 점심시간 1시간을 아껴야 겨우겨우 아이들 하원 라이드를 할 수 있다. 주어진 모든 일을 남들보다 빨리 끝내려면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써야 된다. 식당에서 동료들과 함께 먹는 점심식사는 내게는 사치이다. 커피도 출근 즉시 커다란 보온병에 잔뜩 타서 하루 종일 뜨거운 물을 추가해서 마신다.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끼며 그렇게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동동거리다 보면 어느새 퇴근할 시각이 가까워온다. 출근할 때 동쪽에서 비쳐 온 햇빛이 서쪽으로 기울었을 무렵, 나는 다시 집으로 두 번째 출근을 한다.
지하철 역에 내려 세워둔 개인 자전거를 찾아 둘째 준이가 있는 영어 학원으로 아이를 데리러 간다. 오늘은 특히나 퇴근이 20분이나 늦어져 초등 1학년 아이는 홀로 자습실에서 책을 뒤적거리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다른 아이들 다 갔다고... " 아이가 칭얼거리며 떼를 쓴다.
"미안해,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오늘 회의가 길어져서..."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오느라 헉헉 거리던 숨소리도 잠시, 나는 아이에게 사과하고 있다. 같은 말을 두 번씩 하는 습관은 결혼과 출산 이후, 아이들을 키우며 생겨난 버릇이다. 몸은 하나인데 문어발처럼 동시다발로 수많은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생겨난 행동 습관이었다.
준이를 자전거 뒷좌석에 태우고 마트에 가서 저녁거리를 장 본다. 오늘은 소고기 떡국을 끓여서 먹자. 아이들이 제일 잘 먹기도 했고 요리 못하는 나도 부담 없이 만들 수 있는 한 그릇 음식이었다. 입이 짧은 아이들을 위해 국거리용 고기는 부드럽고 적당히 기름기 있는 차돌 양지로 골랐고 좀 더 비싸더라도 국내산 쌀로 만든 떡국떡을 고른다. 대파도 한 다발 고르고 바나나랑 우유도 담았다. 이제 빨리 계산해야지.. 서둘러 계산대로 갔지만 셀프 계산대로 바뀌면서 매번 결제하기까지 줄은 길었다. 첫째가 올 시간이 됐는데... 나는 마음이 더 바빠진다.
부랴부랴 품목들을 계산하고 물건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다시 퇴근길 자전거에 몸을 싣는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큰 애 연이한테서 전화가 온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요란하게 벨이 울린다. 연이한테는 작년에 복직하면서 혼자 등하교해야 하니 엄마랑 급할 때 연락하자며 키즈폰을 하나 사줬었다. 아직 3학년이지만 또래보다 똘똘하고 야무져서 학교 등하교부터 학원 등하원까지 걸어서 잘 다닌다.
"엄마, 어디야? 나 이제 수학 학원 끝났어."
"응, 고생했어. 엄마 집으로 가는 길이야. 바로 집으로 올 수 있지?"
"응, 엄마! 나 배고파."
"얼른 와. 저녁에 떡국 끓여줄게."
자전거를 집 앞에 안전하게 세워 놓고 작은 애 책가방이며 학원 가방, 장바구니, 내 핸드백 등 온갖 짐을 잔뜩 들고 집으로 들어간다. 식탁에는 아침에 먹다 남은 그릇들이 그대로 놓여 있다. 손도 못 씻고 널브러진 그릇들부터 부랴부랴 싱크대로 치운다. 주말을 제외한 평일에 나는 매일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아침에 나갔다 다 저녁이 되어서야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오는 두 번째 출근을 한다.
집에 도착하면 이미 온몸이 녹초가 되어 더운 날의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지만 배고프다 아우성치는 어린 새끼들을 위해 나는 또 저녁을 차릴 수밖에 없다. 달궈진 큰 냄비에 참기름을 붓고 달달달 한우 차돌양지를 굽는다. 물을 한 바가지 넣고 한참을 끓여 고깃국물을 낸 다음, 불린 떡국떡을 넣고 한소끔 더 끓인다. 마지막에 파, 마늘, 소금 간해서 국그릇에 푸짐하게 담아내며 아이들을 부른다.
"얘들아! 저녁 먹어라!"
요리라고는 라면 끓이는 것 밖에 못했던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달라진 점이다. 없는 솜씨지만 최선을 다해 한 끼 음식을 차려낸다.
연이와 준이는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먹더니 한 그릇씩 더 달라고 한다.
'그래, 너희들도 일하는 엄마 때문에 학교 끝나고 집에도 못 들르고 학원으로 도느라 고생이 많다..' 싶어 짠한 마음에 떡국을 그득그득 떠준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아이 둘 다 오늘 하루 학교에서 또는 학원에서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주로 누구와 놀았는지, 내일 준비물과 숙제 등을 체크한다.
그리고는 나도 배가 고팠는지 떡국을 국물까지 다 먹고는 등 따습고 배 부르니 식곤증에 잠이 쏟아진다. 아이들은 이제 책도 읽고 티브이도 보며 자유시간을 갖다가 각자 숙제를 하고 자겠지... 내일은 무슨 학원을 가더라... 연이, 준이 숙제도 시켜야 되는데... 해야 될 일 생각만 가득하고 막상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게 거실 소파에 반쯤 누워 웅크린 자세로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카톡, 카톡!"
요란스럽게 울리는 카톡 알림에 부스스 일어났다. 대체 얼마나 잔 거지? 시계는 8시 반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까 한참 티브이를 보는 것 같더니 이제는 같이 연이 방에 모여 훈훈남매 만화책을 보는 것 같다. 그래도 연이가 누나답게 준이를 제법 챙겨주어 엄마의 육아 부담을 덜어준다. 참 고마운 딸이다.
카톡이 여러 개가 와 있다. 먼저 남편에게 온 카톡을 확인하다.
'회식이야.'
아, 오늘도 늦는구나... 무미 건조하게 'ㅇㅇ'이라고 답한다. '그래, 남편도 힘들겠지.' 싶다가도 평일 육아에서 자유로운 그 사람과 하루종일 동동거리며 퇴근한, 회사에서 고단했던 나의 하루가 비교되며 상냥한 답변 대신 의무적인 'ㅇㅇ' 답변만이 나간다. 그래도 결혼 전엔 좋아했던 감정이 있었는데 이제는 아이들로 묶인 동지 같은 사이가 되어버렸다.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고 이게 현실이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엔 내 친구들 단톡방. 아이들 키우면서 친해진 동네 엄마들 단톡방이 시끄럽다. 요즘 화제의 드라마 때문이다. <선제 업고 뛰어>!라는 드라마가 그렇게 인기란다. 마침 오늘이 2회 하는 날이고 잠시 뒤에 본방 시작이란다. 잠도 깰 겸 티브이가 있는 아이들 오락방으로 들어가 옆 방에서 독서하는 아이들 방해될까 봐 반쯤 문을 닫고는 조용히 리모컨을 누른다. 재미있다니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드라마는 기대 이상으로 흡입력이 있었다. 1회를 보지 못했지만 스마트 폰으로 드라마에 대한 정보를 찾아가면서 시청하니 충분히 스토리가 이해되었다. 여자주인공이 시간을 돌려 남자주인공을 살리러 과거로 돌아가는 내용이었다. 두 사람은 고등학생 때 서로 이웃집에 살았고 옆 학교 학생이었다. 2회에서 그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회상씬이 나오는데 남주가 노란 우산을 든 채 뛰어오는 여주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배경음악은 김형중의 <그랬나 봐>... '어? 이 노래는 내가 대학 때 나온 노래인데... 2003년도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네에버에 검색해 보았다. 역시... 내 기억력은 아직 녹슬지 않았어! 2003년도 2월에 나온 곡이 맞았다. 바로 내가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여주인공 송이에게 첫눈에 반한 키 크고 잘 생긴 남자주인공 선제... 그리고 20년도 더 지난 bgm <그랬나 봐>...
첫사랑 이야기라는 어찌 보면 식상한 주제의 드라마였지만 난 이미 그 드라마에 빠지고 있었고 20년 전의 나와 내 첫사랑의 모습이 두 주인공들에게 오버랩되며 어느새 지나간 나의 이야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떠올릴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해서 잊고 살았던 그 기억 말이다. 어느새 중년이 되어 현실에 찌든 삶을 사는 나에게도 이런 젊고 아름다웠던 청춘의 순간이 있었지... 그리고 그런 기억을 이렇게 다시 떠올릴 수 있구나... 나조차도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 2004년 3월에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을 만나게 된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