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일(16개월 5일)
아내와 싸우고 육아를 그만뒀다.
여느 부부들처럼 사소한 일로 싸우고 난 뒤 나는 이제 육아를 안 하겠다고 선언했다.
사내가 속 좁게 아내한테 왜 그랬냐 하겠지만..
평범한 남편이었다면 참고 또 참고 웃으며 넘어갔을 테지만 지금의 난 우울하고 예민한 주양육자 아빠라서 조금만 건드려도 쉽게 부서질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
내가 남자니까 힘으로 고집부리고 진상을 부린 거지 육아하는 엄마들은 이런 경우 남편들에게 육아 보이콧을 하는지 궁금하다.
어렸을 적 우리 엄마는 강한 아빠를 이기지 못해 보이콧을 못했다.
그래서 자주 울었다.
그리고 자주 아팠다.
그리고 나에게 화를 많이 냈다.
내 기억 속 엄마는 항상 승질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이 육아를 맡지 않았다면 난 평생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엄마를 용서하지는 못하지만 홀로 외롭고 힘에 겨웠을 그때의 엄마가 안쓰럽고 짠하다.
아무튼 덕분에 무려 월화수목금 5일을 내리 놀았다.
하루종일 논 것은 아니고 아내가 출근한 동안만 아이를 돌봤다.
아내가 집에 있는 동안은 혼자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누워서 핸드폰만 했다.
쉬는 시간이 생겼지만 딱히 할 게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5일 내내 술을 먹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직장을 다니는 분들이 이 글을 본다면 내가 얄미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보다, 싸우고 나서 기분 상했다고 나처럼 삐져서 보이콧하지 않고 묵묵히 육아를 감당하는 배우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보면 어떨까.
승질나서 일주일 동안 집에 안 들어올 테니까 아이는 알아서 돌보라고 억지 부리는 걸 출근한 동안만 아이를 돌보기로 타협했다.
그래서 아내는 육아까지 책임져야 하는 워킹맘이 되었다.
물론 아내 밥도 안 차렸다.
아이 육아를 하느라 지친 아내는 라면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고 출근했다.
방에 있어도 냄새가 나니까 알 수 있었는데 단단히 삐진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대화하자고 방으로 들어오는 아내를 귀에 꽂은 이어폰을 가리키며 아무 말도 안 들리니까 더 이상 말 걸지 말고 나가달라고 매정하게 밀어냈다.
힘에 겨운 아내는 눈물을 삼키며 매번 방을 나갔고 아내가 나간 뒤 닫힌 방문을 보며 나 또한 마음이 아팠다.
잔인하게도 아내의 안위는 신경도 안 썼지만 아들이 마음에 걸렸다.
아빠가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놀아주지도 않으니 아빠의 빈자리가 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결국 아들은 아들이었다.
그동안 방에서 안 나오던 엄마가 이제는 자기 옆에 붙어있으니 신이 나서 하루종일 춤을 췄다.
화장실 가려고 방에서 나와 아들 뭐 하나 보면 엄마 무릎에 앉아 입이 귀에 걸려 깔깔깔 웃어댔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아빠는 관심도 없다.
니들끼리 잘 살아라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삐진 건 난데 왜 갈수록 내가 더 외로워지는지..
아내가 출근하면 나는 방에서 나와 집안일과 육아를 시작했다.
우렁각시가 따로 없다.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리고 아이가 먹을 반찬도 만들어 놓고 설거지도 싹 다해놨다.
아이 산책도 빼놓지 않고 땀 뻘뻘 흘리며 다녀왔고 목욕 역시 매일 시켰다.
그러던 중에 아내로부터 문자 한 통이 왔다.
미안한데 온라인으로 장 본 게 문 앞에 왔는데 정리를 해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알겠다고 답장하고 하나하나 정리했다.
고기는 먹을 만큼 비닐팩에 소분해서 얼려놓고 식재료도 냉장고에 깔끔하게 테트리스 해놨다.
어차피 평소 내가 하는 일들이다.
근데 이번에는 가을철 별미 꽃게도 함께 왔다.
아.. 꽃게 손질..
자연스럽게 꽃게를 씻고 똥을 빼고 몸통이랑 다리를 분리해 소분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열받아 혼자 찜통에 세 마리를 넣고 쪄먹었다.
난 치킨을 시켜도 다리 두쪽 다 아내에게 준다.
꽃게를 같이 안 먹고 혼자 먹는다는 건 내가 단단히 화가 나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내일이라도 아내와 아이가 먹을 수 있게 남은 꽃게들을 지퍼팩에 두고 냉동실에 얼렸다.
꽃게는 냉장에 보관하면 살이 흘러내린다고 한다.
손질을 마친 꽃게 잔해들로 집에 비린내가 날까 봐 싹정리해서 아이 기저귀 더미와 같이 쓰레기도 버렸다.
이쯤 되면 그냥 아내랑 말만 안 하지 할 일은 다 하고 있지 않은가..
삐져서 그렇다 속이 좁아서..
나는 그동안 아내에게 서운하고 억울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대체 누구에게.. 어디에.. 내 괴로움을 말할 수 있겠는가..
엄마들처럼 모여서 수다를 떨지도 못하고 부모님께 나의 어려움을 말하기도 힘들고 친구들에게 아내 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엄마들은 친정이라도 가거나 친정식구들이 도와주기라도 하지 난 온전히 나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나도 친정이 있었으면 좋겠다.
육아가 힘들다고 친구들에게 말해봐도,
제수씨 잘 만난 걸 복으로 여겨라
나도 회사 때려치우고 집에서 육아나 하고 싶다
제수씨가 정말 고생이 많다
이런 말뿐이다.
나도 내 아내가 고맙고 자랑스럽다.
근데 남자란 동물은 늘 그렇듯 공감이라는 걸 모른다.
내가 힘들다는데 제수씨 잘 모시고 살라는 말을 왜 하는지..
그런 나에게 아내가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하면 그 별 것 아닌 것이 내 심장을 후벼 판다.
넓은 마음을 가진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현재는 밴댕이 속이 나보다 클 것이다.
하소연할 곳이라곤 아내밖에 없는데 그런 아내도 없는 이 시간은 정말 어둡고 기나긴 터널 속을 혼자 걷는 기분이다.
고집을 그만 부리고 잘 지내면 되는데 왜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인가 싶으면서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내는 계속해서 날 힘들게 할 것이다.
아내가 못돼서 나에게 그러는 게 아니라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누구라도 좋게 좋게 말로 하면 모른다..
몸으로 부딪혀봐야 아는 게 인간의 한계일지 모르겠다.
당연한 것이 겪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남을 속속들이 다 이해하겠는가..
부부라도 또는 부모라도 말이다.
아무튼 그러던 중에 금요일에 출근한 아내가 문자를 보냈다.
우리 집은 내가 월화수목금 집에서 육아를 하고 토일 알바를 간다.
그래서 이번에 싸우고 타협한 것이, 공평하게 토일은 내가 출근한 동안만 아내가 육아를 하기로 했다 평일에는 반대로 하니까.
금요일에 아내가 보낸 문자는 이랬다.
미안한데 내가 월요일에 출산 후 유방암 검진을 가야 해 그래서 좀 더 일찍 나가야 하는데 육아를 안 하는 시간만큼 토요일 일요일도 내가 하루종일 육아를 할게 월요일에 다녀와도 될까?
이 문자를 받고 고집불통이었던 난 정신을 차렸다.
지금 아내가 건강하니까 나도 이런 생고집을 부리고 있지 아내가 아프기라도 하면 이런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약속대로 토요일 일요일은 내가 육아를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월요일에 다녀오라고 답한 뒤 퇴근하고 대화 좀 하자고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둘이 새벽 4시까지 그동안 못했던 사과와 반성을 하고 부둥켜안고 울며 화해했다.
그리고 효자인 우리 아들은 약속한 듯 7시에 일어났고 난 3시간만 자고 일어나 육아를 시작하며 싸우기 전 원래의 내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오랜만에 좀 더 자고 일어났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냉동실에 보관해 둔 꽃게를 쪄줬다.
집안 분위기도 안 좋은데 혼자 해 먹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꺼내 먹으라고 소분해 놓은 건데..
역시 어떤 마음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다.
꽃게랑 같이 먹으라고 짬뽕 밀키트도 조리해서 차렸다.
오랜만에 나도 아내도 아이도 웃음꽃이 피었다.
우리 부부에게는 길고도 힘든 시간이었지만 우리 아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아무리 봐도 효자다.
아빠 없이도 너무 잘 지내서 참 대견하다.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 잘해주지 않을 생각이다.
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걸 아들이 한 살인 지금 너무도 잘 알았다.
아무튼,
아내와 싸우고 육아를 그만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