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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제어하는 마법의 주문

1-5. 야마 _ 아파리그라하(불탐)

by 고요한동산

조명 안에 서면 쏟아지는 빛에 눈이 부셔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먼 곳에 찬란한 무언가를 바라보듯 하얀빛을 향해 멋들어지게 독백을 합니다. 그렇게 조명빛에 여러 번 놓이고 나면 눈부신 무대에 중독되고 마는 거죠.


열망에 온몸을 던져 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시절, 저는 그렇게 빛에 중독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지독히도 탐했던 것은 눈부신 예술적인 감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감각은 아무리 쫓아도 더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가기만 했습니다. 자꾸 도망가니 미치도록 더 가지고 싶어 지더군요. 배우들이 하나둘씩 돌아가고 텅 빈 극단에 홀로 남아 몇 줄 안 되는 대사를 수도 없이 반복했어요. 대표가 답답한 마음에 문을 열고 소리쳤습니다. "이번 공연만 하고 더 이상 안 할 거야?" 그 말에 저는 겨우 극단을 나와 공원을 수십 바퀴 달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잡히지 않는 것을 쫓아가는 기분을 느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상하게 갈망하면 할수록 제 마음은 얼어붙고 목소리는 딱딱해졌습니다. 갖고 싶다는 마음은 오히려 가지고 있던 것 마저 빼앗아갔습니다.


지난 시간에 드린 질문을 기억하시나요? 바로 이것입니다.

Q. 끊임없이 소유하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나요?


저 또한 답을 찾기 위해 소유하고 싶은 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거울을 보며 배우를 흉내 냈던 어린 시절부터 끝없이 가지고 싶었던 것은 바로 '특별함'이었습니다.

처음 연극을 시작했을 때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가슴 벅차했던 마음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해 원했던 곳에 왔음에도 한없이 부족함을 느끼며 더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대부분 저처럼 가지고 싶은 것들이 있겠지요? 사람들은 그것을 손안에 움켜쥐고 싶어 합니다. 그 욕망들은 돈이나 인정, 권력, 유명함 같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저는 다섯 번째 규율 <아파리그라하(Aparigraha): 불탐(소유의 절제)>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았지만, 소유에 대한 생각들이 잘 정리가 되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습니다.


소유는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구를 말하는 걸까?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 걸까?

마음 안에 일고 있는 가지고 싶은 여러 가지 욕망들이 소유욕인가?

질문만 계속해서 늘어놓았습니다.

요가 철학에서는 소유의 범위가 물질에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내면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갈망과 탐하는 마음, 이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파리그라하(Aparigraha): 불탐>

탐하지 말라. 과연 아무것도 탐하면 안 되는 걸까요?

우리는 소비로 이루어지는 세상, 자본주의에 살고 있습니다.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발생시켜 자본주의 시스템이 가동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소유하고 싶은 마음은 살아남고자 하는 본능에 가깝습니다.


끊임없이 유혹하는 현란한 빛이 주위를 감쌉니다. 화려한 스크린의 향연 속에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굴러갑니다. 수많은 불빛 가운데에서 내게 방향을 알려줄 화살표 따위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LIMITED EDITION 한정판"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고 싶다면, 클릭하세요"
"당신의 성공을 입으세요."
"놓치면 후회할 단 한 번의 기회"

이런 소비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소유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쪽이다" "저쪽이다" 하고 누군가가 외치면 사람들은 이쪽으로 또는 저쪽으로 우르르 몰려갑니다.

"왼쪽이다" "오른쪽이다" 다른 이가 소리치면 몰려있던 이들이 왼쪽으로 또는 오른쪽으로 순식간에 움직이죠. 다급하게 "엎드려"라는 소리가 들리면 영문도 모른 채 포복자세를 하고 겁에 떨고, "일어나"라는 외침에 주위의 눈치를 보더니 슬슬 일어납니다.

"멈춰" 이 한 마디에 움직임을 멈추고, "뛰어가"라는 말소리에 아수라장이 펼쳐집니다.


세상에 외침에 반응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지난 시간 <욕망과 가위바위보>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외부의 영향을 받은 욕망들이 나도 모르게 자리를 잡고 앉아있습니다. 이 사회에서 넌더리가 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던지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리기도 합니다.

요가는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머물며 조화롭지 않은 것 안에서 고요를 찾아보라고 과제를 던집니다. 이것이 더 어려워 보이지만, 원래 삶은 모순덩어리이고 거기에 놓이게 되는 것이 사람의 숙명인 듯합니다.


특별하고 싶은 욕구도 결국 이 세상이 만들어준 갈망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은 연극으로 향하게 했고 그 안에서도 현실과 이상이 서로 싸우면서 결핍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결핍은 저에게 좀 더 소유하라고 부추기곤 했습니다.


아파리그라하는 이러한 욕구를 없애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토록 가지고 싶은 열망에 대책 없이 휘둘리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왜 안 되는 거야? 나는 왜 저렇게 할 수 없는 거야?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특별함을 향한 갈망에 삼켜졌던 순간들이었습니다.

'나는 특별해지고 싶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응원해줬어야 한다고 이제야 알아차립니다.


저는 지금도 글을 쓰면서 잘하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문학적이고 남들이 생각지 못한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특별함을 갈망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갈망은 생명에너지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꿈을 향해 도전할 힘이 생기니까요.

다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불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을 산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특별함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것이 나의 존재를 결정짓는 잣대는 아니니까요.


탐하는 마음에 휘둘리지 않기로 합니다.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응원해 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인 것 같습니다.

욕망을 쫓으며 헥헥 되는 나를 힐책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봐 주는 것, 이것이 아파리그라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말 원하는지, 사실은 없어도 되는지 이 둘 사이에서의 밀당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밀당을 하며 조율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뿌리를 단단히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가지고 싶다는 마음은 인정하되 그 마음에 휘둘려서 자신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국 아파리그라하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빠져 허우적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무언가를 하나 가지면 또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고 그 욕망은 꼬리를 물며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느 순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럴 때는 멈춰서 마법의 주문을 외워야 합니다.

"아파리그라하"

이 단어는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제어하게 해주는 마법의 주문입니다. 간절한 마음과 굳이 필요 없다는 마음을 잘 섞고 응원이라는 조미료를 넣어준 후 외치는 겁니다.

그렇게 주문을 외우면 신비로운 마법이 펼쳐집니다.

나를 옭아매던 탐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한결 자유로워진 자신을 만나게 될 거예요.



이제 주문을 외웠으니 아사나를 통해 그 의미를 되새길 시간입니다.

오늘 소개할 아사나는 아누비타아사나 Anuvittasana (Standing Backbend)입니다.

이 동작을 행함으로써 나를 옥죄던 탐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예요.

뿌리를 단단히 하고 가슴을 활짝 열어 맘껏 호흡해 보세요.

아누비타아사나(Chatgpt 생성)


발을 붙이고 흔들리지 않는 산처럼 뿌리 깊게 Tadasana(산 자세)로 섭니다.

숨을 들이마시며 손바닥을 마주 보게 합니다.(합장)

숨을 내쉬면서 엉덩이를 약간 앞으로 밀어요.


숨을 들이마시면서 가슴을 위로 열어주며 뒤로 조금씩 뻗어나갑니다.

내 마음에 갇히지 말고 활짝 열어놓고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뒤로 젖히려고 하지 마시고 호흡을 불어넣어 가슴을 확장하면서 뒤로 뻗어나가야 해요.

호흡이 멈추는 느낌이 든다면 뱉어내고 다시 마셔보세요.

이 자세에서 3~5 호흡 정도 머무르면서 한 걸음 물러나 나를 바라봅니다.


발바닥으로 단단히 뿌리를 잡고 서서히 산자세로 돌아옵니다.


주의) 너무 강한 통증이나 호흡하기가 힘들다면 가동성을 줄이거나 제자리로 돌아오세요.


야마는 절제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힘사. 사랑을 향해 폭력을 제거하고,

사티야. 진실을 향해 그릇된 마음, 말, 행동을 제거하고,

아스테야. 내면의 평온을 향해 비교와 탐욕을 제거하고,

브라마차리야. 에너지의 집중을 향해 진짜가 아닌 욕망을 제거하고,

아파리그라하. 진정한 충만함을 향해 소유에 매달리는 마음을 제거합니다.


아쉬탕가는 여덟 개의 가지를 의미하고 그 첫 번째 야마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절제는 결국 한 걸음 물러나 나를 바라보며,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내고 방향을 다시 세워가는 일인 듯합니다.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죠?

지혜를 추구하며 나아가는 과정이 철학이고 그 과정에서 나의 삶은 조금씩 조화로워집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쉬탕가 철학의 두 번째. <니야마(Niyama) — 내면의 규율>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겠습니다.


미리 질문을 던집니다.

Q.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치유를 위해 어떤 것을 하시나요?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다시 이야기 나눠요.

고맙습니다.


<다음 이야기 예고>

아쉬탕가 철학의 두 번째 이야기

니야마(Niyama) - 내면의 규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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