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를 읽다가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하루키의 책을 들추다가, 지난번에 쓰다가 만 글을 다시 적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제목만 적어두고 본문은 적지 않은 글이다. 어느 날 떠오른 문장..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제목에 적어두고는 한참을 묵혀뒀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나자 제목마저 지워버렸다.
그런데 하루키의 책을 펼치니 그 제목이 떠오르는 것은 왜인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루키는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은 '글자로 써보지 않으면 어떤 사물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에, 문장을 직접 써보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생각났다. 내가 지워버린 내 글의 제목.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제목을 적어두고도 말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딱히 어찌 쓸 바가 생각나지 않아서였고, 이어갈 말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이 되어 보니 '글을 써야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라고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 어불성설인 것도 같으나, (실제로는 삶이 끝난 적도 없으니) 비뚤어지고 인정받지 못한 시간을 공들여 들여다보고 보듬어주어야 다시 발걸음을 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듯하다. 하루키처럼 '글자로 써보지 않으면 어떤 사물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워서', 그러니까 사물에 대한 심오한 사고를 하기 위해 쓰는 것은 아니고, 시간을 적어내지 않으면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워서 적는다.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워서 적는다.
내게 있어 시간을 마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고립 혹은 괴리로 감추어 둔 시간들을 꺼내어 눈앞에 대령하는 일을 스스로 한다는 것이 유쾌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눈싸움하듯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봐야 앞으로의 시간을 오롯이 내 것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가졌다.(가졌던 듯하다는 가정형을 쓰는 것이 지겨워 단정 지어 표현해 본다.)
이 작업이 앞으로의 시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혹은 영향 따윈 없이 그저 독립적인 하나의 행위에 불과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쓴다. 언제나 결과는 내 손을 벗어난 일이었으니 나는 내 할 일만 한다.
획기적인 기획도 어떤 기약도 없이 써 내려가는 시간들이지만 하루키의 말처럼 나는 손을 움직여 문장을 직접 써보지 않을 수 없다. 하루키의 말을 조금 응용하자면, 나는 써보지 않으면 내 이야기를 제대로 마주 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재의 나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