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곤 Sep 01. 2024

특별함

누군가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

‘특별하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무엇이 보통보다 뚜렷이 다르다.
또는 그것이 다른 것에 비해 중요하다.

 
대부분은 특별한 것을 좋아한다. 한정판 상품, 연예인, 다른 사람들에겐 없는 스스로의 차별점과 같은 특별함을 선호한다. 물론 특별하다고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특별함 중에서도 긍정적인 이미지의 특별함을 선호한다. 왜 특별함이라고 다 좋아하는 게 아닐까? 나는 그 이유를 이득관계에서 보았다.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이득관계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일, 휴식, 사회적 관계 모두 이득관계에서 등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자는 그렇게 말한다. 사람이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것은 전통적인 경제에서 생각하는 인간이고, 요즘의 연구로 인해 밝혀진 것으로 봐서는 사람은 이득이 없어도 충분히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인정한다. 연구 결과가 엄연히 있는데 틀렸다고 하는 것은 그저 내 억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과 물질적 가치를 제외하고 추상적인 가치도 이득으로 생각한다면 어떨까?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을 보자. 그들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 이런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경제에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일이 끝난 뒤의 성취감이나 어려운 이들을 도왔다는 도덕적 고양감이 없다면 봉사활동을 했을까? 이는 우리가 아는 유명한 딜레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트롤리 딜레마에서 우리가 레버를 내릴지 말 지 고민하는 이유는, 스스로의 도덕성에 금이 가는 행동을 했다는 것과 그 행동으로 인한 사람들의 비난 때문일 것이다. 일종의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어떨까? 하나의 가정을 해보자. 사람을 죽이는 것에 전혀 거리낌 없는 킬러에게 당신의 행동의 결과를 당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하면 딜레마가 성립할까? 킬러는 아마 굳이 힘쓰기 싫어서나 그래도 여러 명 죽는 것보다는 한 명 죽는 게 낫겠지 라는 시답잖은 이유로 레버를 당기거나 그대로 둘 것이다. 그 선택에 고민은 딜레마라고 하기엔 힘들 것이다. 조금 더 편한 쪽으로 선택을 해버릴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이득과 손해를 기준으로 행동을 한다.



 갑자기 이득 이야기는 왜 했을까? 하는 의문을 이제 풀어보자. 우리가 긍정적 특별함을 좋아하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 이득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스스로가 특별한 것도 좋아하고 특별한 존재도 좋아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세상에 몇 없는 이라는 수식어도 좋아한다. 이런 수식어를 통해 사람이 없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관심일 것이다. 특별함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다. 관심도 하나의 이득으로 과하지 않다면 이는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부정적 특별함을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정적 특별함도 관심을 주는 것은 맞지만, 관심과 함께 낙인도 함께 찍힌다. 범죄자, 부도덕적인 행동을 한 사람. 그리고 이런 낙인은 ‘이런 사람은 사회에 있어선 안된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그런 생각들이 많아질수록 부정적 특별함을 가진 사람은 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든 게 된다. 이는 이득이 안 생겨서 싫어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이득들을 앗아가기 때문에, 손실이 생기기 때문에 싫어한다고 볼 수 있다.
 
 몇 사람들은 나는 특별한 게 싫어, 나는 평범한 게 좋아라고 말하곤 한다. 그 들은 정말 특별한 게 싫은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특별한 게 싫다’라고 주장한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기기에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특별한 게 좋다고 하는데 스스로 특별한 게 싫다고 하는 스스로의 특별함을 좋아하는 것일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은어나 속된 말처럼 이야기하는 ‘힙스터’라고 할 수 있다. 진짜 평범한 게 좋고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이, 사람들의 평균치에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그는 진짜로 특별함을 싫어하는 것일 거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사람들은 모두 특별하거나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유명인사들도 그렇고 이는 나 또한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은 태어난 순간 누군가의 특별한 존재가 된다. 부모님의 특별한 존재, 부모님 주변 인물들의 중요한 존재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성장하면서 또 다른 사람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사람이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은 그런 의미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특별한 존재가 되면서 생존에도 우월해진다는 점이 이득으로 작용할 것이다. 물론 생존과 이득과도 연관되어 있지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좌절감이 사람을 좀먹기도 한다.
 
 다른 누군가의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은 처음에는 쉽다. 학교와 같이 내 자율적인 의지가 아닌 외부의 강제로 같은 공간에 같이 모이게 되면서 누군가의 특별한 존재가 되는 법을 배운다.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자연적으로 부여받은 특별함이 아닌 스스로 일궈낸 특별함을 원하게 된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자율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때가 오면 누군가의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은 어려워진다. 그 사람은 그 사람만의 고유한 특별함의 경계가 있을 것이다. 자연적으로, 그리고 후천적으로 일궈진 특별함에 내가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앞에서는 특별함의 망에 들어가는 게 어렵다고 했지만, 그 사람의 특별함에 들어가는 것은 어찌 보면 쉬울 수 있다. 문제는 특별함에도 순위가 있다는 것이다. 보통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혈연관계가 가장 윗부분에 속해있을 것이고, 그다음에는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99번째 특별함에 들어가는 것은 쉬울 것이다. 하지만 다들 조금 있으면 눈치를 챌 것이다. 말이 99번째 특별함이지 그 사람은 나를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나를 첫 번째로 놔주었으면 하지만 실상은 99번째에 있다는 것은 상실감을 일으키게 된다.
 
 가끔은 손쉽게 누군가의 특별함에 지정되었으면 한다. 나를 최상단에 두고 계속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쉽지 않음을 느낀다. 아무래도 나 조차도 쉽게 누군가를 최상단에 두지 않으니까, 누군가를 가장 윗순 위에 두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내 바람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느낀다.

작가의 이전글 상처 핥아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