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수집증
잡생각을 하면 내게 독이 된단 걸 알고 있다. 만약에 이랬더라면 하는 상상부터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는 망상까지, 과거와 미래를 수차례 오가고 현재로 돌아왔을 때의 그 감각은 상당히 가라앉을 때와 비슷하다. 결국에 망상이란 것을 인지했을 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몰려오는 감각은 비참함을 넘어 지저분하다. 아직도 못 놓고, 못 버리고 움켜쥐고 있는 나를 보는 것은 마치 수집증에 걸린 사람을 보는 듯하다.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것을 모으는 게 아니라 추상적인 생각을 모으고, 기억을 모으고, 감각을 모으며, 추억을 모은다.
사람의 후각이 기억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듯, 사람의 감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유기적으로 상당히 복잡하게 얽힌 상태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단 한 가지를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힘들다. 추상적인 가치에 대해 생각하면 그와 관련된 많은 것들이 생각난다. 약간은 차갑게 얼굴을 얼리며 상쾌하게 불어오는 바람, 강가의 물 내음, 사람들이 걷는 소리, 근처의 차도에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얼어붙은 손, 입안에 맴도는 껌의 단 맛, 얼굴이 땅겨오는 느낌과 옆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추운 듯 내쉬는 숨소리... 추상적인 가치 하나를 떠올렸을 때 사람은 오감을 모두 떠올린다.
뭐든지 과하면 독이 되는 법,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추상적인 가치라고 해도 버리지 못하고 모으기만 하는 건 독이 된다. 사람의 감각은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추상적인 가치를 버리지 못하고 되새김질하듯 그 가치와 연관된 감각을 느끼다 보면 사람은 피로해진다. 그러다가 스스로가 더 이상 그 감각을 느낄 수 없는 곳에 와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감각의 괴리를 느끼며 괴로워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데, 이 감각들을 다시 한번 제대로 느껴봤으면 하는데,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아직 어려서 씁쓰리한 나무막대의 맛을 알면서도, 남아있는 그 단맛을 느끼고 싶어 다 먹은 아이스크림을 계속해서 핥고 싶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나무막대가 썩어 사라질 것을 알지만 애써 부정하며 오늘 맛있게 먹은 아이스크림의 나무막대를 하나씩 소중히 통에 모으고 있다. 나무막대를 모으는 것에 의미는 없지만, 오늘 하루가 재밌었다는 하나의 징표와 같이, 하나씩 하나씩 언젠가는 쓸 일이 있겠지 생각하며 통에 나무막대를 씻어서 넣는다.
나무막대가 갈라지고, 휘어지고, 더 이상 간직할 수 없게 됐을 즈음, 나무막대들은 이미 여름의 추억들과 얽혀버렸다. 덥지만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더 먹고 싶어 씁쓸한 맛이 날 때까지 입에 나무막대를 물고 친구들과 놀던 그 추억들. 나무막대들을 보면 그 추억들이 너무나도 아른거려 버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버려야 한다. 추억들과 뜯어내야 한다. 더 깊게 뿌리내리기 전에 굳게 결심하고 그 나무막대들을 버릴 수 있을 즈음 나는 한 단계 성장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성장하지 못했나 보다. 나는 아직도 버릴 수 없다. 나무막대들이 한가득 쌓여 내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추억들이 이미 내게 너무 깊게 뿌리내려버렸다. 나는... 그걸 뜯어내는 게 너무나도 두렵다. 나라는 존재를 뜯어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아직도 잡생각을 하며 뜯을 날을 미룬다. 언젠가... 내가 견딜 수 있을 때 뜯어내야지... 하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가득 쌓인 기억들과 추억들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며 기억이 사라지는 것에 슬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