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과 속도의 파시즘적 사회
매년 국가가 주도하는 수능이라는 빅 이벤트는 나의 가슴을 철렁이게 한다. 내가 가진 직업 특성상 학생들을 만날 일도 많고, 수능날에는 너무나 힘든 특별 업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 그러니까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수능날을 그저 고생하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생각을 자세히 파고들어 보니 내 안에 수능을 보던 고등학생 시절의 내가 이제는 희미해져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었다. 이제 나는 완연히 성인이구나 하고 먼저 떨어진 낙엽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11년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단번에 입시를 통과하는 것이 유일한 성공이라고 여겼다. 재수를 하는 것은 실패라는 분위기가 교실과 학교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대학별 입시 결과 발표날이면 희비가 교차하여 친구들의 얼굴에는 선명한 명암이 자리잡았다.
20살에 대학생인 친구들은 그들끼리, 재수생인 친구들은 또 그들끼리. 당시엔 그 1년의 시간을 순간순간으로 살아내던 터라 그 1초가 다른 1초보다 크다고 오판했다. 나는 20살에 바로 대학에 입학했고, 20살 수능일에는 재수하는 친구들의 수능 응원을 오프라인으로 뛰기도 했다. 그것은 즐거웠고, 추억이었고, 오만했다.
이제 서른을 넘긴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친구들 중에는 재수를 한 친구도 있고 휴학을 여러차례 거듭하여 동기들보다 늦게 졸업한 친구도 있다. 또한 군대를 늦게 가서 20대 후반에 전역을 한 친구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모이면 우리는 같은 자리에 있다.
순간순간의 속도는 상황에 따라 늦다고 생각할 수 있는 반면, 모든 사건과 상황은 지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특히 이 땅의 사람들은 속도에 강박을 느낀다. 그것을 가장 심하게 느끼는 것이 바로 고등학생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공통된 단 하나의 목표와, 단 한 번의 시험인지라 같은 경과를 보낸 이들 중에 한 번 뒤쳐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 당연한 부분이고, 압박이다.
20세기의 관성으로 21세기의 속도를 사유한 프랑스의 철학자 폴 비릴리오는 그의 저서 <속도와 정치>에서 현대 사회를 '속도의 파시즘적 사회'라고 일컬은 바가 있다. 빠른 속도 그 자체는 미덕도, 악덕도 아니지만 현대 사회는 빠른 속도를 개인에게 강박한다는 것이다. 수능을 2일 앞둔 고3 학생들이 느끼는 압박 역시 이 사회의 풍토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수를 하는 것, 대입의 시기가 밀리는 것은 삶에 있어서 작은 과정이나 변속에 지나지 않는다. 지나고 돌아보면 모두가 같은 자리에 모여있다. 그리고 그 시기에 어떤 과정을 지나왔는지보다 지금 당신이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땅에 떨어진 낙엽은 낙하하지 않은 단풍을 올려다보는 법이다. 학생들의 현재가, 그리고 현재 자신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음이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는 법이다. 먼저 떨어진 낙엽이 여전히 알록달록한 단풍을 올려다보는 것과 같이 지금의 삶은 그런대로 아름답다.
그러니 지나갈 과정이라면 속도가 주는 강박과 압박에서 벗어나 여유롭고 편한 마음으로 수험생들이 시험에 응하기 바란다. 설령 1년 더 나무에 매여 있게 되었다고 해도 너는 여전히 아름다운 단풍이라고, 먼저 져버린 낙엽은 모두 너를 올려다보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수능의 날은 누구에게나 아찔하고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너무나 시원한 가을날로 남아있는데, 내가 19살에 느낀 시원한 가을을 모든 수험생과 가족들이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