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본질적인 나
사회적 존재보다 근원적인 나에 대하여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정말 여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철학의 큰 뼈대 중 하나인 존재론적, 인식론적 관점에서만 보아도 다양한 견해에서 나에 대해 사유해볼 수 있다. 나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고 상대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를 물어본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에서 맡은 역할의 표상과 상징인 직업을 이야기하거나 자신의 소속된 단체와 그곳에서의 직급을 이야기하며 사회적 역할로서의 존재성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회적 역할과 인간의 존재는 별개로 존재한다. 사회적 역할은 유동적이지만 개인의 고유성은 불변이기 때문이다. 고유성은 개인이 대자적 존재로서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개별적 관점을 형성할 때 획득된다. 그러므로 사회에서의 역할과 소속으로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의 실존성은 무엇으로 확보되는 것일까? 먼저 나를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사유하고 의식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실존성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존재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와중에도 의심의 대전제인 의심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제1원칙에 근간을 둔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을 통해 사유하는 존재의 실존성이 모든 것을 의심하는 상황에서 의심이라는 행위 이전에 전제된 의심하는 존재가 실재함을 통해 증명된다고 이야기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cogito ergo sum'의 번역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데카르트의 말은 그런 의미다. 내가 내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한다고 해도 의심하는 행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의심을 하는 나의 실존이 전제되어야한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객관적인 실존에 대한 가능성을 확보하고 나면 나는 실재로서, 환경에 던져진 의식적 주체로서 기능하는 존재인지를 또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신적 자각 이전에 'an sich', 즉자 상태의 존재는 객관적으로 기능하고 실재하는 주체로 인정받기가 어렵겠다. 주체적으로 의심하는 행위가 없다면 의심 이전에 전제되는 주체의 존재도 주장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즉자 상태에서 변증법적 정신 자각이 이루어져 'fur sich', 대자적 존재가 되면 자신의 존재를 세상,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고 자기의식을 대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자적 존재에 이르러서 자신과 세상에 대한 사유가 가능할 때 나의 실존을 논할 수 있겠다. 이에 따라 나는 대자적 존재로서 나를 스스로 규정하고 인식할 수 있는 자격과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나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이야기가 이루어질 수 있겠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나이길 바라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관망하는 존재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이 가진 아름다움이 있으면 그것을 느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나는 시와 수필로 등단했지만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떠한 실용적인 직업을 가지려고 했었고, 그것을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했고, 진로를 설계했으며 그 직업도 가졌다. 그러니까 나는 이 분야에선 무엇인가 되고자 인위적인 노력을 가한 것이다.
하지만 시인과 수필가는 된 것이다. 대단히 의도하지 않았고, 내가 자연스럽게 하던 표현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인위적인 노력을 거듭해서 되게 한 것과 고유한 본성에 따라 된 것, 즉 이루어진 것 중에 무엇이 나를 더 본질적으로 드러내주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나를 이룬 자연적인 속성이 바로 나의 존재의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속성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관망하고 표현하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때 자신의 역할과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 매몰되곤 한다. 하지만 역할과 지위에 의해 획득되는 정체성은 고유성을 본질적인 고유성을 가지기가 어렵다. 그러니 모두 자신이 무엇이고 어떤 존재인지 깊이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리고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에 대해 더욱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자신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될 때 더욱 적극적으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유의 과정을 즐겨주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