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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시카 Sep 20. 2024

아득한 고향, '밭둑'의 기억   

                       - 밭둑외풀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들이 있겠지만 내게도 지나온 내 삶을 뒤돌아보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청승이나 자기 연민 때문이 아니라도, 예전이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쳤을 때 페이지의 여백에 흘려 쓴 짧은 감상문, 하늘하늘 떨어지는 네 잎 클로버를 보면서 문득 그런 순간과 마주치지요.  


명절에 되돌아보는 아득했던 시간은 조금 더 색다릅니다.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아직도 어렸던 그 시절, 어느 해 추석 명절을 보내고 난 후 뜬금없이 손위 동서가 건네주었던 장난감 같은 목걸이를 기억하며 기어코 눈물이 나고야 맙니다. 나만큼이나 어리고 여렸던 동서... 우리는 말하자면 명절의 전투를 함께 치러내야 했던 전우였을 것입니다. 서툴기만 했던 집안일, 차례 상차림... 일머리 없이 허둥거리며 끝이 보이지도 않는 일을 해내고 한숨을 돌렸을 때, 그 명절의 끝자락에서 동서는 마치 실없는 농담을 건네듯 내게 그 우스꽝스러운 목걸이를 주었습니다. ‘이제 끝났지? 손만이 아니라 팔뚝까지 터버렸네. 이럴 땐 로션보다는 바셀린이 최고야. 이걸 바르며 내일부터 다시 씩씩하게 출근해 봅시다.’ 아마 그 정도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 소박한 다정함에도 목이 메었던 명절의 시간...... 공부만 하고 살아왔을 그녀는 대학의 교수이자 종가의 큰며느리, 종부(宗婦)였습니다. 그 두 개의 역할이 사이좋게 어울리기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제 명절 휴일의 마지막 날입니다. 내게 이렇게 평화로운 명절이 있었는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늘 우리 땅 저 끝에 붙은 시가의 큰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일부터가 일종의 전쟁이었습니다. 길 때는 17시간, 그나마 운이 좋은 때는 10시간... 참으로 길고 짜증 나고 힘든 여정이었지요. 아이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신경 날카로운 부모, 위태로운 차 안의 분위기 때문에 배가 고파도, 지루해도, 심지어는 소변이 마려워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10시간 넘게 차에 시달리며 달려가도 바로 부엌으로 달려가야 하는 분위기... 처음에 나는 나를 빼고 ‘합의된’ 일종의 불필요한 잔혹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내 알게 되었지요. 그건 내가 지켜야 하는 규율이었을 뿐 아니라, 특별히 다정하지는 않으셨지만 나쁜 분들도 아니었던 시부모님들께서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여 지켜야만 했던 일종의 사회적 불문율이었을 겁니다. 무릇 며느리는 그래야 한다는. 하지만 그 당시 길고 험한 여정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내 마음은 긴 시간 운전에 발걸음마저 휘청거리는 남편을 보면서도, 그거야 남편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그의 선택마저도 그의 선택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종가의 무게, 실재한다고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고향 떠나 서울살이 하는 아들이자 오빠에 대한 가족 구성원들의 무언의 압박, 모시고 살지 못하는 부모님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 그에겐들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요? 


내가 수십 년간 경험했던 일인데도 마치 먼 옛날,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네요.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들이 경험한 명절의 바깥쪽 풍경은 같았으나, 어쩌면 그 의미는 서로에게 너무나 달랐을 것입니다. 남편에게는 무슨 의미였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부모에게로 돌아가는 길,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찾아가는 길, 자신의 원점으로의 회귀, 완벽했던 삶의 원형으로의 회귀였을까요? 낯선 타지에서의 고달픈 삶, 하지만 그래도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자식을 낳아 키우고 있다는 자랑스러움도 조금은 섞여 있었을까요? 내 자식들도 나처럼 고향을 가진 존재, 돌아갈 곳이 있는 탄탄한 존재가 되어 이 어려운 세상을 언제라도 씩씩하게 헤쳐 갈 힘을 가지기를 기원했을까요?  


이제 그런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어른들은 세상을 뜨셨고, 내 아이들도 이제 어른이 되어 늙어갑니다. 나는 평화로운 삶을 꿈꿉니다. 과거는 그냥 그 자리에 남겨두고 돌아서서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습니다. 적어도 나는 열심히 살았고, 그 역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했지만 며느리로서의 의무도 그럭저럭 해내었다고 자부합니다.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으렵니다. 이제는 정말 행복해지고 싶습니다. 내게 행복이란 평화, 평온과 동의어입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순간 그 행복은 ‘꽃’과 함께 찾아오곤 합니다. 



마침 며칠 전 가벼운 마음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간 산책길, 밭둑도 아니고 논둑도 아닌 아파트의 벽돌 길을 걷습니다. 평소 바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잠겨 있어서 주민들의 발걸음이 뜸한, 나름대로 고즈넉하고 조용한 벽돌 길입니다. 아파트 2개 동에 걸친 짧은 산책로, 그다지 넓지도 않은 길. 우연히 들러 본 그곳, 빨간색의 벽돌이나마 시멘트 발라진 길에 비해 멋지다고 생각하고 걷노라니 벽돌의 틈새에서 아주 작은 무엇인가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살펴보니 분명 ‘~~ 외풀’ 종류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논과 같은 습지도 아니고 물이라고는 비가 내릴 때 살짝 젖었다가는 바로 말라버리는 이 길, 그 틈새에서 어떻게 이런 꽃이 피어났는지 믿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꽃이 언제나 어디서나 ‘기적’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았던 나는 그 기적의 존재를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틀림없습니다. ~~ 이라고 표현한 것은 ‘외풀’ 집안의 가계도가 조금 복잡한 데다가 평상시 습지에 가 볼 기회가 드물었기에 그저 스쳐가는 잡풀,  여기서 잠시 외풀 집안의 아이들을 소개해 보면 외풀을 비롯하여 논둑외풀, 밭둑외풀, 참새외풀, 미국외풀, 가는미국외풀, 나도미국외풀이 있습니다. 이 코딱지 만한 아이들을 제대로 구분하자면 그만큼의 여유와 애정이 있어야 가능할 텐데 고백하거니와 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이렇게 만났으니 이 꽃과 내가 제대로 사귀어야 할 시간이 온 것이지요.  


우선은 식물의 모습을 대충 살펴보고 도감의 설명과 맞추어 봅니다. 아무래도 ‘밭둑외풀’인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확실하게 하기 위해 국립생물자원관에서 제공하는 자료를 읽어봅니다.  


논둑외풀에 비해서 잎은 타원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고, 3~5개의 나란히맥이 있으므로 구분된다. 또한 북미 원산의 귀화식물인 미국외풀은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고, 꽃자루가 잎보다 짧으며, 씨의 끝이 둥글므로 다르다.  


꽃의 모양은 작기도 하고 생긴 모양도 거기서 거기이니 가장 중요한 차이는 ‘잎’인가 봅니다. 사진을 보니 잎의 모양이 타원형이네요. 1번 문항은 통과!

잎의 가장자리는 물결 모양도 아니고 거치가 없이 매끈하고 털도 보이지 않습니다. 2번 문항도 통과!

잎에 유난히 선명한 나란한 잎맥이 보이네요. 3번 문항도 통과!

이렇게 해서 나는 이제 자신 있게 이 꽃이 밭둑외풀임을 선언합니다.  


잎만 보면 꽃이 섭섭하겠지요?

포스팅된 사진을 보면 꽃의 색이 연한 분홍빛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던데 내가 본 꽃들은 흰색 일색이었습니다. 하기야 사진으로 보면 약간 색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요. 



꽃은 줄기 윗부분의 잎겨드랑이에서 길게 나온 꽃자루에 달립니다. 사진에서도 꽃자루가 잎보다 긴 것을 확인할 수 있네요. 꽃은 입술 모양으로 아랫입술은 3개로 갈라집니다. 이건 분명하게 보입니다. 어떤 자료에는 윗입술이 2개로 갈라진다고 하는데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가운데 부분이 약간 쏙 들어간 모양인데 이것을 갈라졌다고 봐야 하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네요. 수술 4개 중 2개는 긴 것은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 하필 외풀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가 궁금했습니다. 바깥을 의미하는 ‘외’가 아니라 그 열매의 모양이 참외를 닮아서 외풀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니 이해가 됩니다. 열매 실물은 보지 못했고 자료만을 찾아보니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옛사람과 나, 그 시간의 간극을 생각할 때 같은 모양을 보았다고 해서 같은 사물을 떠올린다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 밭둑외풀이 논이나 밭에서 질긴 잡초로 악명을 떨치는 이유는 잘 번지기 때문이라는 데, 꽃가루받이가 제대로 되지 못했을 경우 폐쇄화를 만들어 제꽃가루받이를 해서까지 기어코 씨앗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잠시 폐쇄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꽃은 기본적으로 속씨식물의 생식기관입니다. 같은 종의 다른 식물에서 꽃가루를 받아 씨앗을 만듦으로써 꽃들은 서로의 유전자를 교환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유전적으로 다양한 후손을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이때 제꽃가루받이를 통해 생식을 한다면 유전적 다양성이 줄어들면 여러 가지 취약성이 나타나게 되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후손들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심한 경우 단 한 가지 종류의 질병이나 기생충에 의해서도 절멸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잡하기도 하고 자원도 많이 들기는 하지만 유성생식이 현재 지구상 생명체의 가장 보편적인 생식전략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물 부족, 저온, 빛의 부족 등 악조건의 환경에 놓여서 꽃가루받이에 실패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재앙이 됩니다. 그간의 모든 노고가 물거품이 되는 것이지요. 일부 식물들은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기발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바로 폐쇄화입니다. 


폐쇄화란 꽃이 성숙하여도 꽃잎이 벌어지지 않고 그 닫힌 꽃잎 속에서 자신의 수술과 암술로 꽃가루받이를 하는 꽃을 말합니다. 제꽃가루받이의 위험성도 크지만 최악의 경우 꽃가루받이 자체가 안 될 경우에 대비하여 씨앗을 남기려는 방책이지요. 플랜 B인 것입니다. 


요즘 길을 걷다 보면 봄에 꽃을 피웠던 제비꽃들이 푸른 잎으로 여전히 싱싱하게 자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좀 더 자세히 관찰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보게 되지요.      

       




위의 사진은 봄에 꽃가루받이를 통해 만든 씨앗입니다. 참 귀엽지요?

아래쪽의 사진이 바로 폐쇄화입니다. 아마 많이들 보셨을 거예요. 다만 그저 그러려니 하며 무심히 지나치겠지요. 제비꽃이 그렇게도 많은 곳에 피어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생식전략에 힘입은 바 큽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꽃 가운데 제비꽃, 솜나물, 개별꽃, 광대나물, 새콩, 고마리 등도 이런 폐쇄화를 달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이 밭둑외풀이 아파트 단지 안 벽돌길에서 피어나 나를 만나게 되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국립수목원에서 제공하는 정보에는 제주특별자치도와 울릉도, 경기도 이남에 분포하며, 습지나 논두렁에서 자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식물의 영토는 늘 변하고 더욱이 최근에는 기후변화로 인한 북상의 속도도 나날이 빨라지고 있다니 서울에서 발견되는 것이 놀랍지도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곳 서울의 외곽, 그 언젠가는 논과 밭이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때 어디선가 씨앗 하나가 날아와 땅 속에 깊이 잠들어 있다가 적당한 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을 수도 있겠네요. 밭둑외풀은 아직도 먼 옛날 이곳이 밭이었을 때 그 둑 위에서 피어났던 아득한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기억이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내게 하는 하나의 힘이 아닐까요? 모든 기억은 차츰 옅어지기는 하지만 흔적 없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있다가 어느 날 문득 튀어나와 ‘나’ 자신을 잊지 않게 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비록 그 기억이 늘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마치 남편에게 고향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힘이 들고 숨이 차고,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도 기어코 찾아가서 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 그곳에 도달해야 비로소 편히 쉴 수 있는 곳, 그 기억들......  



척박한 벽돌 틈 사이에서 아득한 밭둑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며 피어난 꽃, 나도 나의 지나온 시간을 조용히 뒤돌아보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 나아가고 싶습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산다는 것은 늘 놀라움의 연속이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변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나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 사족입니다. 


국립수목원의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밭뚝외풀'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나는 국립생물자원관의 자료를 참조하여 '밭둑외풀'이라고 적었습니다.

'밭둑'이 우리의 표준어이고, 밭뚝은 북한의 표현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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