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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시카 Nov 09. 2024

철없던 키다리꽃, 철들어 날리는 멋진 열매

                                - 붉은서나물









사람과의 만남이 그러하듯 꽃과의 만남도 일종의 인연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붉은서나물’과 나와의 인연은 그리 찰떡궁합은 아닙니다. 키가 어찌나 껑충하게 큰지 사진을 찍기에 적당한 녀석을 찾기가 힘듭니다. 적당하다 싶으면 크랙 사이에서 피어났다는 사실이 잘 표현되질 않습니다. 어느 날 작은 빌딩의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바닥에서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이 꽃을 발견하고는 마음에 담아두었으나 다음 날 가보니 모두가 뿌리째 뽑혀 내동댕이쳐진 모습만 보게 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붉은서나물은 크랙 정원에서 피어나는 꽃치고는 정말 큽니다. 어떤 녀석들은 1m가 넘을 정도이니 마치 철도 들기 전에 훌쩍 키만 커버린 아들 녀석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혼자 슬며시 미소 짓기도 합니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얌전하게 자란 남동생들만을 알고 있던 나는 남자아이라도 여자와 큰 차이가 없다고 믿었지요. 그런데 아, 그 철없던 질풍노도의 시간들...‘인간’을 특징짓는다고 믿었던 많은 개념들 예를 들면 남이 보기에 단정한 외모, 사려 깊은 행동, 사소하나 지켜야 할 규칙에 대한 존중, 다가올 일에 대한 나름의 대비, 잘못 풀린 일에 대한 자책과 반성 등등... 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그 아이는 이제 의젓한 어른으로 성장해서 가끔씩 늙어서 주책이 없어진 어미에게 날카로운 조언을 던지기도 합니다. 우왕좌왕 좌충우돌했던 녀석의 성장기는 다행히 자유분방한 창의력의 낌새였나 봅니다. 물론 나는 아직도 녀석이 ADHD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몰래 의심하고는 있습니다.  



가까운 친척인 ‘주홍서나물’은 깊어가는 가을에 종종 만날 수 있었지만 사실 이 꽃이 내 눈에 띄어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은 올해가 처음입니다. 그러고 나서 살펴보니 사방에 피어나 있더군요. 역시 그 초기 정착 단계에서 보여주는 귀화식물의 번식력은 대단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위에서 가까운 친적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주홍서나물과 붉은서나물은 ‘속’ 자체가 다른 식물이다 보니 사실 촌수로 따지자면 그리 가까운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둘 다 귀화식물이긴 하지만 붉은서나물은 북아메리카가 원산인데 비해 주홍서나물은 아프리카가 고향이라고 하니 그 차이가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주홍’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까닭은 바로 이해가 됩니다. 꽃의 색이 주홍색이니까요. 그러나 ‘붉은’은 왜 붙었을까요? 조사해 보니 꽃이 아니라 그 줄기가 약간 붉은빛을 띤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네요. 글쎄요, 사진을 자세히 살펴봐도 줄기가 붉다는 점은 그리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한 자료에 의하면 이 식물은 산불이 난 자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식물이라서 불의 붉은색을 연상시키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도 합니다. 영어 이름도 American Burnweed인 것을 보면 불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긴 합니다마는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정보라서 살짝만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그렇다면 ‘서나물’은 또 어떤 연유로 붙은 이름일까요?

사실 서나물이라는 식물은 없습니다. 다만 ‘쇠서나물’이라는 식물이 있지요. 붉은서나물의 잎 모양이 그 식물의 것과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고 하네요. ‘쇠’라는 접두어는 쇠서나물의 잎에 소의 혓바닥처럼 깔깔한 거센 털이 있어서 붙은 것이고요. 에고야~~ 조금 정신이 없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거친 줄기와 소의 혓바닥을 닮은 깔깔한 잎이 달린 쇠서나물이 우리나라에 자생하고 있었고, 외국에서 귀화한 새 식물의 이름을 어찌 붙일까를 고민하다 보니 그 잎의 모양이 쇠서나물을 닮은 데다가 줄기가 약간 볼닥그레해서 붉은서나물이 되었고, 비슷한 식물 중에 꽃잎의 색이 주홍색인 녀석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꽃을 피웠으니 이름이 없으면 곤란할 터, 그래서 주홍서나물이 되었다는 사연이네요. 사실 세 식물들이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은 듯하여 사진으로 소개해 봅니다. 쇠서나물 사진은 찍어 놓은 것이 없어서 설명만 살짝 덧붙입니다. 항렬이 같은 세 식물을 비교해 보니 차이점이 확연해서 단지 이름으로만 가까운 식물들 같습니다. 





붉은서나물은 국화과의 식물입니다. 국화과 꽃의 구조를 다시 한번 소환해 봅니다. 보통은 하나의 꽃처럼 보이나 꽃의 중심부에는 암술과 수술을 모두 갖춘 ‘대롱꽃’이 빼곡하고, 가장자리로는 암술만을 가진 ‘혀꽃’이 화려하게 달리는 것이 국화과 식물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어떤 녀석은 대롱꽃만 가질 수도 있고 어떤 녀석은 혀꽃만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요. (중대가리풀 참고) 


그렇다면 이 붉은서나물은 어떤 부류에 속할까요?

4번 사진에 집중해 봅니다. 여물어 가는 씨앗의 중심부에 아직도 꼿꼿하게 서있는 대롱꽃들은 보이나 혀꽃은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쇠서나물은 두 가지 꽃을 모두 가지고 있고 색깔도 노란색이어서 얼핏 보면 고들빼기의 꽃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그에 비해 이 녀석은 별 볼일 없는 대롱꽃만으로 당당하게 번식의 경기장에 나서서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강한 번식력을 선보이고 있으니 문제는 없나 봅니다.  



붉은서나물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그 열매의 갓털(우산털)입니다. 가을철 국화과의 꽃들이 대개는 비숫한 모습으로 익어가지만 이 꽃의 열매는 유독 풍성해 보입니다. 그래서 별명도 ‘솜풀’이 되었나 봅니다. 무더기로 피어 있다가 익어가는 붉은서나물의 모습을 보면 말 그대로 곱고도 새하얀 솜이 달려있어 겨울날이 가까워 오는 이때 마음까지 따스해집니다.  





가을의 거리에서 눈에 띄는 저 껑충한 키의 꽃을 보면 무언가 설익어 보이지만, 그 튼튼해 보이는 줄기와 억세어 보이는 잎사귀까지 이미 단단하게 자라날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네요. 다른 어여쁜 꽃에 시선을 두는 동안 이 녀석은 어느새 새록새록 자라나 남들의 시선을 독점하는 화려함은 없었지만 차분하고 겸손하게 꽃을 피웁니다. 그리고 크게 보잘것이 없는 꽃에 비해 그 열매는 풍성하고 섬세합니다. 그 결실 앞에서 나는 마치 불길같이 타오르던 사춘기의 방황을 끝내고 이제 차분하게 늙어가는 늙은 히피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한 번도 방황해 보지 않은 자의 영혼과는 다른 깊이와 허무와 달관이 엿보이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가을에만 가질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풍요로움...  



되돌아보니 아들아이가 사춘기의 폭풍과도 같은 시간을 거치는 동안 나도 천천히 어른이 되어간 것 같습니다. 인간에 대한 틀에 박히고 협소했던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인생을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모두가 같을 수는 없다는 것, 삶에는 모범답안에 없다는 것,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실은 이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에서 본다면 저 모퉁이의 거품과도 같이 작고 소소하고 곧 꺼져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는 점도 아이를 키우며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잠 못 이루는 숱한 밤과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걱정거리, 싸움꾼과 같은 용기, 그리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짜내는 모든 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랑’이라는 것이 상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먼저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는, 남들은 모두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사실들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아이를 키우며 겪었던 어려움의 대부분은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엄마인 나의 문제였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어리고 어리석었던 엄마 밑에서도 잘 커 준 아이들에게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입동이라고 하네요. 찬바람이 휘리릭 불며 붉은서나물의 열매를 하늘로 띄어 올립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덩어리처럼 보이던 솜의 뭉치도 서서히 성글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나머지 열매들마저 하나씩 둘씩 날아올라 먼 곳으로 떠나가겠지요. 그곳 땅에 내려앉아 자리를 잡고 내년이면 싹을 틔우고 튼실한 가지를 세우고 억센 잎을 만들어 다시 꽃을 피우고 씨앗을 야무지게 만들어 낼 것입니다. 나는 다만 그 곁을 스치며 바라봐 줄 뿐입니다. 그리고 기다려 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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