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기황새냉이
비라도 올 것 같이 흐린 아침, 베란다 창틀의 화분걸이에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습니다. 아파트 전체가 이상하리만큼 고요한데 색색으로 물들어 가는 산을 배경으로 새들이 가끔씩 포로롱 거리며 낮게, 낮게 날고 있습니다. 마치 액자 속 그림을 보듯 평화로운 풍경, 마음이 차분하고 이유 없는 행복감이 차오릅니다. ‘필시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나는 중얼거려 봅니다. 그 멋진 예감이 길고 간절한 기다림의 시간을 사뿐히 지나 현실로 들어올 것이라 믿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또 바라봅니다. 베란다의 작은 내 정원, 작년에 친구가 선물한 포인세티아가 봄과 여름을 지나 이제 꽃을 피울 준비를 하는지 잎사귀 중심 부분의 색이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저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내 기쁨과 행복도 활짝 피어날 것이라는 예감에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들에게 나의 희망 사항을 투영하는 어리석음이라고도 생각하지만, 꿈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어리석음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기 마련이지요.
점심거리를 준비하러 시장으로 나갑니다. 익숙한 그 길, 나의 크랙 정원에서 또 다른 꽃을 발견합니다. 아주 작은 꽃, 믿을 수 없지만 아무리 봐도 ‘냉이’ 종류가 틀림없습니다. 꽃의 세상에는 놀라운 일들이 이렇게나 자주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곤 합니다. 가을에 냉이라니요! 아직 채 피지 않은 꽃봉오리까지 풍성하게 달고 있는 것을 보니 이 아이, 다가올 겨울도 두렵지 않나 봅니다.
벌써 여러 날 피고 지고 또 피어났는지 멋진 열매까지 달고 있네요. 자, 이제 올바른 이름표를 달아줄 시간입니다.
냉이라고 생각했지만 냉이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땅바닥에 로제트잎 (뿌리잎이 지면상에서 방석처럼 방사상으로 펴진 상태)이 보이질 않기 때문입니다. 로제트잎은 냉이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로제트잎의 장점 중 하나는 땅바닥에 납작하게 붙어있다 보니 추위에 매우 강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추운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다른 식물들보다 먼저 새싹을 틔우고 재빠르게 꽃을 피울 수 있지요. 초록의 식물이라고는 모두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겨울철에도 꽃마리, 꽃다지, 냉이, 민들레, 질경이, 개망초 등의 로제트잎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겨울을 나고 다음 해의 삶까지를 생각하는 식물들의 영리한 대비책 중 하나가 되겠네요.
이번에는 열매의 모양을 봅니다. 이 또한 냉이의 그것과는 다른 모양새입니다. 왜냐하면 냉이의 열매는 가운데가 오목 들어간 역삼각형 모양 또는 하트 모양이거든요. 그런데 이 꽃의 열매는 길쭉한 바늘 모양이네요. 그렇다면 이 아이는 황새냉이, 그런데 황새냉이치고는 너무 작은 걸 보니 옳거니 애기황새냉이! 그런데 애기황새냉이는 아직은 정식 명칭으로 인정되질 않았네요. (미기록종) 그래도 모든 자료를 취합해서 살펴보니 애기황새냉이가 맞습니다.
두 냉이(황새냉이와 애기황새냉이) 간에는 기본적으로 공통점이 많지만 차이점도 꽤 있습니다.
우선 이름 자체에서 보듯 애기황새냉이는 그 크기가 무척 작습니다. 위의 사진들을 보면 어느 정도 실감이 날 것 같네요. 또 황새냉이는 봄철 1번 피는데 비해 애기황새냉이는 1년에 서너 차례 핍니다. 그러다 보니 이 계절에 내 눈에 띈 것이지요. 국가생물종목록이나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는 그 이름은 물론 정보도 찾아볼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어서 소개해 봅니다.
학명은 C. manshurica (Kom.) Nakai를 정명으로 하였으며, 국명은 황새냉이보다 키가 작고 꽃이 소형인 특징에 기인하여 ‘애기황새냉이’를 채택하였다. (출처 : Korean J. Pl. Taxon. 2015;45(2):136-144.)
(http://www.indica.or.kr/xe/plant/10781845)
언젠가는 정식으로 국가기관의 식물 목록에 그 이름을 올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냉이 종류와 같이 꽃잎이 4장인 꽃을 ‘십자화과’라고 분류합니다. 꽃잎의 개수는 여전히 식물을 분류할 때 중요한 기준점이 됩니다.
십자화과 식물들은 대체로 4장의 꽃잎과 4장의 꽃받침잎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알아보기가 쉽지요. 그리고 이들 중에는 배추나 무, 겨자(갓), 유채, 콜라비와 같은 식용 채소의 꽃이 많습니다.
애기황새냉이의 꽃을 접사 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왜 십자화과라 하는지 바로 이해가 되지요. 꽃잎이 4장이라는 의미인데, 앞쪽의 꽃을 보면 꽃잎이 4장임을 확인할 수 있지요. 뒤쪽의 아직 활짝 피지 않은 꽃이나 봉오리를 보면 꽃받침조각이 4개 임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수술은 6개, 암술은 1개입니다. 꽃을 둘러싸고 보이는 저것들은 열매이지요.
십자화과의 꽃들은 봄에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꽃을 우연히 보게 될 때까지는 이런 이름의 식물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살기는 살아왔으니 그게 무슨 별일이냐 싶기도 하겠지만 내 세상에 없던 존재가 이처럼 뜻밖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나의 우주가 넓어진 셈, 이 일이 내게는 크나 큰 사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보고, 그 이름을 불러주고 그리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이 꽃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여름에 그렇게도 자주 출몰하여 나를 괴롭히던 모기들이 꽤 오랫동안 보이질 않아 며칠 전 침대에 설치했던 모기장을 철거했습니다. 의외로 방이 깔끔해 보이고 넓어진 듯하여 만족스러웠던 시간도 잠시 어젯밤 느닷없이 통 보이지 않던 모기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귓가에서 들리는 왜앵~소리, 앗 깜짝이야! 잠들기 힘이 듭니다. 그동안 이 녀석은 어디에 숨죽이며 살고 있다가 모기장이 철거되자마자 떡 하니 나타난 것일까요?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귓가를 맴도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그 녀석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겠지요.
서울의 겨울은 맵습니다. 일본에서 살다 온 지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나라의 겨울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뺨을 에이는 듯한 칼날 추위라고 하더군요. 그냥 차가운 것과는 또 다른 ‘매움’이랍니다. 이 매운 겨울날 크랙 정원에 무슨 꽃이 남아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땅 속에서 겨울을 견디는 나의 꽃들과 함께 나도 긴긴 침묵 속에 잠겨 푹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또 누가 알겠습니까? 매움을 온몸으로 견디며 여전히 초록의 생명력을 내보이는 작은 친구들이 눈이 내리는 날, 쨘~~ 하고 내 눈앞에 나타날는지 아직은 모르는 일입니다. 숨죽이고 숨어있던 저 모기가 어느 날 갑자기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 내 잠을 방해했듯이 말입니다. 잠이 이루지 못했던 어젯밤, 나는 새롭게 알게 된 애기황새냉이의 생각을 하고 또 했습니다. 매운 겨울날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애기의 의연함, 그 모습을 바라보며 느끼는 애잔함은 나의 몫인가 봅니다.
내일 아침에는 애기황새냉이는 아니더라도 냉이된장국을 끓여야겠습니다. 늦가을에 맛보는 냉잇국의 향기가 벌써 코끝에서 맴도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