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방가지똥
멋진 책을 만나 읽느라 지루하지 않았던 한 주였습니다. 그것도 무려 2권입니다.
<그가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 (로라 데이브 지음, 김소정 옮김, 마시멜로)
<브로큰 하버> (타나 프렌티 지음, 박현주 옮김, 엘릭시르)가 그 책들입니다.
시간 죽이기 딱 좋은 범죄 소설이라 생각하며 시작했지만 다 읽고 나서는 상처 깊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내는 방법에 관한 책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소설의 두 주인공이 녹록지 않은 세상을 견디며 살아내고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매우 달랐다는 점도 이 독서가 행복했던 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앞의 책의 주인공은 자신과 상대방의 사랑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과거의 결핍과 상실을 이겨나가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남편의 실종과 이해할 수 없는 사건, 그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을 끝없이 밀어내는 남편의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그녀는 어릴 적 받아본 적 없는 엄마의 사랑이 아이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기에, 아이가 건강하고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는 새로운 울타리, 새 가족을 만듦으로써 자신의 비참했던 과거를 뛰어넘고 그 상처를 치유합니다. 그 대가는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과의 영원한 이별이었지만요. 늙어서 마음이 약해진 탓일까요? 나는 이처럼 용감하고, 이처럼 자율적이고, 이처럼 현명하고, 이처럼 티 나지 않는 깊은 사랑의 마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원제는 <The last thing he told me>입니다. 뉘앙스가 상당히 달라서 살짝 아쉬웠지만 번역자야말로 작품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남달랐을 테니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책은 전혀 달랐습니다.
어머니의 깊은 우울증과 자살을 경험했던 소년, 그리고 그 자살이 자신의 탓이었다고 생각하는 소년은 이제, 그 어머니의 자살 현장에 함께 있었던 여동생의 걷잡을 수 없는 광기를 감당하고 견디며 형사로서의 위태로운 삶을 이어갑니다. 이 책은 희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절망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800 페이지가 넘는 책을 다 읽고 나서 책을 덮으면서도 나는 따스함과 희망을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 주인공의 정신은 늘 얇고 날카로운 면도날 위를 걷는 것 같이 위태롭고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잠시만 눈을 감아도 그의 세계는 언제라도, 아주 사소한 자극만으로도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세계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질서와 원칙, 예외 없이 적용되는 합리성뿐입니다. 그가 그런 기준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런 원칙들이 그를 선택하고 이 땅에서의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것 같습니다. 소설의 주 내용으로 등장하는 일가족 살인사건을 해결하면서 그는 그의 세상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런 선택이 그를 구원으로 이끌었을까요? 소설은 그 무엇도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간신히 유지되던 그의 세상은 이제 스스로의 선택으로 인해 망가져 버렸고 그는 무너진 세상에 홀로, 오롯이 홀로 남겨집니다. 어쩌면 그때가 바로 더 이상은 유지될 수 없는 자신의 가치와 기준들을 부숴야 할 시점이었을까요?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면 그는 망망대해와도 같은 무정한 세상에 다시 자신의 깃대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세우겠지요. 세울 것입니다. 죄 없는 한 사람과, 죄는 지었으나 다른 선택이 없었던 또 다른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무너뜨린 원칙이었으니 그에게도 구원은 있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고 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루를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두 소설이 다 감동적이었지만 정작 내가 더욱 공감하고 가슴 아팠던 것은 브로큰 하버의 주인공을 볼 때였습니다. 그가 앞서의 책의 여주인공보다 훨씬 더 약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내면은 황량하고 온통 절망에 절어 있습니다. 철갑을 두른 듯한 그의 외면은 실은 살짝만 힘을 주어도 바스러질 수 있는 내면의 연약함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작가는 잔인하게도 그에게 어떠한 연민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작가가 보기에 세상은 본질적으로 그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래저래 잠을 설치고 피곤한 아침, 살살 다가오는 두통도 멀리 날려 보낼 겸해서 오랜만에 아침 산책을 나갑니다. 이내 허름한 담벼락에 기대어 피어난 한 무더기의 꽃이 보입니다. 굳이 가까이 다가서서 보지 않아도 또렷하게 느껴지는 날카로운 가시와 거친 실루엣, 바로 ‘큰방가지똥’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도 않았건만 나란히 줄지어 서있습니다. 물론 틈새 사이 눈썹만큼의 흙에 뿌리를 내리노라니 그런 모양으로 피어난 것이겠습니다만 내 눈에는 마치 군대의 사열 장면처럼 질서 정연한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세상을 다 밀어낼 듯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하고, 한 치의 빈틈조차 허용하지 못하겠다는 듯 보이는 질서 정연함, 어제 읽었던 그 소설 주인공의 내면과 겹쳐 보입니다.
방가지똥은 그 이름의 유난스러움 때문에 잘 잊히지 않는 꽃입니다. ‘똥’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주는 역설적인 느낌! ‘더럽고 하찮고 치워져야만 하는 배설물’ 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런 단순한 인식을 한참이나 뛰어넘어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하게 소비된 똥의 이미지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굳이 프로이트의 항문기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우리들에게 똥은 서양인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도 합니다. 똥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누구나 똑같이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것이자 농사일에서는 아주 소중한 자원... 인간에 의한 인간 냄새 가득한 작품... 식물 이름에도 똥이 들어간 것들이 몇 있습니다. 애기똥풀, 말똥비름, 쥐똥나무, 개똥쑥, 지역에 따라서는 보리수나무를 보리똥나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더럽다기보다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이름들입니다.
방가지똥 이름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방가지’는 충정도 사투리로 방아깨비, 그런데 이 방아깨비는 위험을 느끼면 흰 분비물을 내뿜는다고 합니다. 방가지똥도 잎을 꺾으면 흰 분비물이 나오는데 이것이 나중에 갈색으로 변하면 그 모양이 방아깨비의 똥 같다고 하여 방가지똥이라고 부른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큰방가지똥은 방가지똥과 비슷하지만 그 차이점도 비교적 확실합니다.
우선 이름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큰방가지똥은 대체로 방가지똥에 비해 식물체의 크기가 큽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큰방가지똥의 잎 가장자리에는 방가지똥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거칠고 날카로운 가시가 있고, 또한 방가지똥의 잎은 가지를 완전하게 감싸고 있는데(아래의 방가지똥 2번 사진) 비해 큰방가지똥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 더욱 중요한 기준점입니다. 내 경험으로는 이 두 가지 식물의 차이점은 꽤 뚜렷한 편이어서 구분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꽃은 혀꽃만 있는 전형적인 국화과 식물의 모양입니다. 바람에 날리기 시작하는 부드러운 털을 달고 있는 열매의 모습까지도...
가시는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들이 자기 방어를 위해 만든 조직입니다. 초식 동물이나 해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선인장과 같이 건조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식물들의 경우는 수분의 손실을 막기 위해 잎을 가시로 변형시키기도 합니다. 잎이 변해서 가시가 되기도 하고 줄기의 일부를 가시로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털이 잔가시가 되기도 합니다. 그 사연이야 어찌 되었던 가시는 식물에게 있어서나 동물에게 있어서나 기본적으로는 ‘다가오지 마!’라는 사인으로 해석되며, 상대에게는 무기가 됩니다.
소설의 오독(誤讀)이 식물을 보는 시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한 큰방가지똥을 보며 소설 속 주인공의 내면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다가오지 마! 난 나 혼자서도 충분해! 내 원칙만이 온 세상이야!라는 원칙은 ‘백번 중 아흔아홉 번은 사람들이 문을 열고 초대하기 때문에 살인이 일어나.’,‘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사건을 자초한 거야.’라는 날카롭고 거대한 가시로 돋아납니다. 형사로서의 경험에서 나오는 충고라고 하더라도 그 표현에서 느껴지는 내면의 까칠함에 소름이 돋습니다. 가차 없습니다. 연민도 없습니다. 그것이 사실일지라도 너무나 아픈 말들입니다. ‘살인은 열정 없이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 그러기에 대개의 살인 사건은 피해자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일어나기 마련이야!’라는 표현과는 결이 너무도 다릅니다. 같은 사실을 표현하는 이 표현의 삭막함이 바로 그의 내면의 모습입니다. 그의 말은 치유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면도날이고 날카로운 가시일 뿐입니다. 말은 상대의 가슴을 찔러 끝내 피 흘리게 합니다. 독자까지도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의 내면의 풍경은 상처받고 아파하는 소년의 그것입니다. 톡 하고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연약함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얼굴에는 베개에 눌린 자국이 사라지지 않은 채 남아있습니다. 유연함과 탄력을 잃은 피부, 얼마나 지나야 이 자국이 사라질까요? 그러나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몇 시간 지나면 자국은 옅어지고 그리고 사라지겠지요. 내 내면의 완고함과 딱딱함, 나의 가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지다가 마침내 소멸하는 단계에 이르게 될까요? 가시 없이도 ‘내’ 생각을 유지하고 ‘내’ 감정에 솔직하고 그리하여 ‘나’의 영역을 지킬 수 있을 그 단계, 그 성숙의 경지를 상상해 봅니다. 때로는 하고 싶어도 해서는 안 되는, 또는 하지 않는 편이 나은 말을 꾹꾹 누르고 걸러내는 인내와 지혜가 너무도 부족함을 느낍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노력하고 배워야 하는 ‘인간에의 길’은 아직도 길게 남아있습니다.
큰방가지똥은 따뜻한 계절을 다 보내고 난 지금까지도 열심히 어여쁜 꽃을 피워 올리고 있습니다. 밤새 불던 바람에도, 새벽에 내려앉은 서리에도, 이제는 충분히 따뜻하지 않은 햇볕에도 굴하지 않고 저렇게 꼿꼿하게 서 있네요. 가시를 달았던 그렇지 않던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그 인고의 시간 앞에서 내 불경한 상상이 문득 부끄러워집니다. 나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호모 사피엔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