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또는 철학 및 인문학 유명인들의 주장이나 저서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저는 요즘에 아침에 일어나 침대를 정돈하고 세안을 한 후에 물을 마시고 아파트 단지 내를 산책합니다.
전과는 달리 날씨도 매우 선선하고, 오늘따라 햇빛이 짱짱해서 하늘도 주위도 선명하게 눈에 잘 들어오더라구요. 아이들이 뛰노는 것도, 어르신들이 두런두런 얘기하시는 것도 보기 좋았습니다. 문득 요즘따라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이것들을 못 보게 되겠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몹시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이 생각은 조금 더 이어져서, 어디선가 들었던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라는 말이 떠올라 걷는 내내 사색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장 그 자체에 물음표가 찍히게 됐습니다.
과연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이죠.
먼저 저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들었던 생각에서부터 차근차근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예를 들어, '내일 죽는다면 오늘 뭘 할래?' 같은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질문 말입니다. 이에 저는 당연하게도 ‘평소에 하고 싶은데 못했던 것을 해야겠다.’라는 답을 떠올렸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도 비슷할 겁니다. 누군가는 여행을, 누군가는 가족과의 시간을, 누군가는 그동안 미뤄왔던 고백을, 이처럼 각자마다 떠오르는 다른 답들이 있겠죠.
하지만 여기에는 크게 놓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내일 어떤 일로 인하여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며, 이것을 ‘스스로가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내일 죽는다는 것이 변하지 않고, 내가 그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될 거라 믿어져야지만 평소에 하고 싶었어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 외할아버지께서는 매일같이 술을 드셨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시더라도 술로 인해 간에 문제가 발생해서 돌아가실 것이라 생각했었죠. 하지만 돌아가시게 된 원인은 폐렴이었습니다.
친할아버지께서는 연세가 100세를 앞두고 있으신데, 최근에 미끄러지시면서 수술을 하시게 됐습니다. 당연히 병원에서도 수술하는 도중에 돌아가실 확률이 높을 거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수술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현재 친할아버지께서는 건강하십니다.
또한 지인 중에 한 분은 암환자셨는데, 병원에서 3개월도 안 남았다고 말을 들었지만, 3년을 넘게 더 사시다 가신 분도 계셨습니다.
이러한 제 주변의 예시처럼, 죽음이라는 것은 예고하고 찾아오지도, 확정되어 있지도, 그 순간을 우리가 알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평소에 못하고 꿈만 꾸던 것을 실행하는 것은 몹시 어렵습니다.
이것은 간단한 예시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직장인이고 내일 죽는다는 것이 확정됐다면, 회사를 안 가고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든가 먹고 싶었던 비싼 음식 같은 것을 먹으며 그 하루를 지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러나 내일 죽을 확률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면,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언제 찾아올지 모를 죽음을 걱정하며 아무것도 안 할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이처럼 현실은 결국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보내며 내일을 맞이할 것이며, 저 문장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못할 겁니다.
내일 죽는다는 것이 예정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오늘을 평소와 같이 보낼 확률이 매우 높은 것이죠.
그렇다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것을 대비하며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사는 것도, 미래를 포기하며 현재만을 바라보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들이라면 도대체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라는 말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저는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 오늘의 너에게 충실하게 살아라’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충실히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일반적으로는 열심히 산다는 것을 떠올릴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죠. 하지만 ‘열심히’로는 마지막인 것처럼 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열심히 살아봤자 마지막 날인데 무슨 소용이 있나?'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그래서 열심히로는 이를 설명하기에 부족합니다.
'충실하다'의 뜻은 단단하고 알차다는 것입니다.
하루를 알차고 단단하게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그 하루에 내가 만나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만끽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충실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등굣길에, 출근길에, 밥을 먹으며, 샤워를 하며 등등 다양한 시간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지루함을 피하고자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며, 노래를 들으며, 유튜브를 보며 지나가죠.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연락보단 만나기를 바랄 것이고, 노래보단 주변 사람들의 대화가, 유튜브보단 주변의 풍경이 더 아쉬울 겁니다.
즉, 가상의 것이 아닌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것들이 보다 중요해질 겁니다.
이를 바탕으로 보자면 하루를 충실히 보내는 것은 매우 간단하고 쉽습니다.
아침에 울리는 알람을 선택한 이유를 다시금 상기하며 기상한다든가 매일 먹던, 또는 간단히 지나치던 아침밥을 맛을 느끼며 먹는다든가 등교 또는 출근을 하며 지나가던 풍경을, 사람들을 한번 본다든가 등등.
익숙한 것들의 아름다움 또는 익숙한 것들이 주는 잊고 있던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바로 하루를 만끽하는 것이죠.
앞서 서문에 제가 세상이 아름다워 보인다 했었죠.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아마 어느 날 갑자기 길가의 가로수 잎사귀가 선명하게 보이고, 하늘이 눈부시며, 사람들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는 날이 있을 겁니다.
그것에 집중하면 가슴이 몽글몽글해지죠. 그게 바로, 익숙했던 것이 사실은 충분히 아름다움을 줄 수 있으며 자신에게 행복감을 선사해 줄 수 있다는 걸 만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을 이렇게 하다 보면 당연하게도 결국 또 익숙해지고 별거 없게 느껴질 겁니다. 결국 또 그전의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내게 될 확률이 높겠죠.
물론 그 또한 좋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이라도 충실히 보낸다면 활력 넘치게 그 한 주를 보낼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똑같은 하루 안에서 먹고 사느라 바빠서 미뤄두었던 새로운 여행과 도전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매일이 설레고 힘이 날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사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여행과 도전은 누구나 시도할 수 있고,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매일 아침 타는 버스, 지하철을 조금 더 일찍 일어나 다른 역에서 타보는 것도 여행이며 도전입니다.
아니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보는 것도, 또는 조금 돌아가 보는 것도 여행이며 도전이죠.
같은 곳에서 매일 보는 누군가에게 아침 인사와 간단한 대화를 해보는 것도 여행이며 도전이구요.
그 사람과 친구가 되어 아침마다 수다를 떨 수도, 그 사람이 인맥이 되어 언젠가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점심시간에 전혀 안 먹어 봤던 음식점에 간다든가, 편의점에서 새로 나온 인스턴트 음식을 사 근처 공원에서 먹으며 하늘 구경하는 것도 여행이며 도전이라 할 수 있죠.
귀갓길에 이름 모를 카페 창가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동네에서 가보지 않았던 길을 걸어서 집으로 가는 것도 여행이며 도전입니다.
이처럼 평소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곳에 궁금증을 가지고 새롭게 시도해 보는 것만으로도 평소와 다른 삶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간단하죠? 하지만 이보다 간단한 것도 있습니다.
집에 가는 길에 꽃이나 맛있는 음식을 사는 것도 좋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길가에 핀 들꽃이나 가로수, 풍경 등을 찍어서 부모님이나 배우자, 자식들에게 보여 주면 어떨까요?
그걸 보여 주는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야 합니다.
'이쁜 걸 보니 부모님이 생각나서, 배우자가 생각나서, 자식이 생각나서, 시간 되면 오늘이나 내일 같이 구경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평소에 안 그러다가 그러면 이상하게 보이는 게 당연할 겁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상하게 볼 지라도 그 대상은 내심 기분 좋을 거라는 거죠.
아, 물론 싸우고 난 후라면 사과를 하거나 오해를 푸는 것이 먼저입니다. 싸운 것을 풀고 난 후에 상대방 기분이 어떨까요? 좋을 것입니다.
굳이 꽃일 필요도 없으며 사진일 필요도 없습니다.
'맨날 먹던 식당에서 밥을 먹다 보니 갑자기 당신이 생각나서 같이 밥 먹으면 어떨까 상상해 봤다.'는 얘기만 하더라도 상대방은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이는 가족에게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양한 이들이, 다양한 일들이 있을 겁니다. 반에서 친구를 대할 때에도, 직장동료와 얘기할 때에도, 바이어를 만날 때에도 평소와 같고 익숙하기에 놓치는 것들이 있을 게 분명하니까요.
물론 누군가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에 빠져, 죽으면 더 이상 못 느낄 수 있다 생각하며 슬퍼하거나 눈물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꽃이 피고 지듯, 화창한 하늘이 있는 날이 있다면 우중충한 날이 있을 것입니다.
우중충한 날이라고 아름다움이 없을까요?
꽃이 진 식물에 아름다움이 없을까요?
'자존감'에서 말했듯 아름다움이란 극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이 말은 관점에 따라 세상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는 뜻이죠.
그렇기에 눈앞의 아름다움이 사라진 이후를 생각하며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후에도 그곳에는 아름다움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또한 눈앞에 있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벌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슬퍼하며 보내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을까요?
물론 이렇다 해서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없어질 미래를 생각하며 슬퍼하기보다는 없어진 곳에 새롭게 피어날 것을 생각하며 설레는 것이 더 낫고,
새로운 미래를 생각하며 설레기만 하는 것보다는 눈앞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집중하며 즐기는 것이 더 낫다는 것뿐입니다.
'내일이 없다'는 생각은 오늘을 더 가치 있게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도구이며, 삶의 향과 맛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조미료이기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내일이 없다는 것이 단순히 진짜로 내일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과 같은 내일이 없다'는 것을 뜻할 뿐이며, 이는 내일이 되면 없어질 오늘을 안타까워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라'가 전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초반에 말했듯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일지라도 많은 것들을 하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언제 올지 모를 죽음을 걱정하며 후회될 일들을 하고 즐기기엔 미래가 걱정되죠.
또는 각자마다 다양한 이유로 하루하루 버티는 것만도 힘에 부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그 하루를 만끽하며 충실하게 산다면,
그렇게 지겨우리만치 반복되던 매일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즐기며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언젠가 다가올
말 그대로 '마지막 날'이 온다 할지라도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