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어디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분명 처음 온 곳이 확실했다. 그런데 어떻게 왔는지가 기억나지 않았다.
모든 게 하얗고 반짝였으며, 어쩌면 얼마 전에 신축한 곳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감탄하며,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 넓은 곳에 아무도 없다는 게 신기할 만큼, 그래서 어쩌면 이 공간이 두려울 수 있지만 생각보다 겁나지는 않았다. 공기의 따스함인지, 어디선가 들어오는 햇살 덕분인지 하여간 그랬다.
누군가 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인상 좋아 보이는 적당한 나이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젊었는지, 나이가 들었는지 가늠하기 곤란한 그런 모습이었고, 분위기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나무씨를 담당할 안내자입니다.”
멀뚱히 보고만 있는 나무에게 안내자는 다시 말했다.
“이나무씨, 이동할 준비가 되셨나요?”
나무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처음 본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준비가 되었냐고 묻다니 나무는 이 모든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이라는 게 되지 않았다. 물어봐야 했다.
“여기가 어딘가요?”
무언가를 보고 있던 안내자는 그제야 당황해하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았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나무가 더 당황해하지 않도록 천천히 말했다.
“여기는 삶과 죽음 사이, 천국과 지옥 사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여기 있는 우리는 이곳을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나무는 분명 듣고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공간요? 아무것도 없는 이 넓은 곳이 공간인건 맞잖아요?”
안내자는 다시 웃으며 나무에게 말했다.
“생과 사 그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삶과 죽음이라고요? 그런데가 왜 있어요?”
“아, 이나무씨가 지금 그 상태입니다.”
그 말에 나무는 그제야 떠오른 기억을 하나하나 확대해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아까 죽은 건가요? 맞나요?”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실감이 나지 않아서 일지도 몰랐다.
“아직 나무씨의 생명이 끝난 건 아닙니다. 그러나 삶에 연결된 신호가 약한 건 맞습니다.”
신호라는 게 나무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 왜 벌써 여기와 있는 건가요? 다 끝나야 여기 오는 거 아닌가요?”
“아, 이나무씨는 특수 상황인지라 여기로 먼저 오셨습니다. 선택사항이 생겼기 때문이죠.”
선택사항이라니.. 멍하게 서 있는 나무에게 손짓으로 문을 향하길 바라며, 안내자가 먼저 앞장서 밖으로 나갔다.
나온 밖은 좀 전의 공간과 비슷하지만 훨씬 컸고, 아무것도 없진 않았으며, 각자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이제껏 본 어떤 장면보다 평화로워 보였다. 다들 자신의 일에 신경 쓰느라 나무가 바라보는 것에 관심 없어 보였다.
나무는 다시 자신을 따라오라는 안내자의 기척에 넓은 길을 따라 걸었다. 나무가 지나가자 다들 나무를 보며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나무는 인사를 받느라 수도 없이 꾸벅거렸고, 어느샌가 또 다른 문 앞에 와 있었다.
“이나무씨, 들어가시면 됩니다.”
문이 열렸고, 나무는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이리로 오세요. 이나무씨.”
이 세상 온화함을 다 가진듯한 인상 좋은 사람이 나무에게 말을 했다. 눈이 부셔 나무는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예쁜 의자와 탁자가 놓인 곳으로 가서 자연스럽게 앉았다. 손으로 탁자를 쓸어보았다. 부드러운 느낌이 가득했다. 분명 딱딱해 보였는데, 말랑할 것 같은 부드러움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이나무씨는 2월 20일 오후 4시 50분,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게 되었습니다.”
나무는 앞에서 불러주는 날짜와 시간에 다시 한번 그 순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세상 가득 한숨을 내뿜고 있던 나무는 건물 난간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고, 의지와 상관없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죽음을 선택할 모습이었지만, 그냥 자신과 비슷한 마음이라면 서로의 신세한탄으로 이야기를 터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뜻하지 않은 희망도 있었다. 결코 희망적이지 않을 내용들일 게 분명했지만.
“저기..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거기 위험해요. 내려와서 나랑 이야기해 봐요.”
나무의 말에 두려움과 단호함을 오가는 표정이었던 앳된 여학생은 눈물을 그렁거렸다.
“아니요. 저는 결심했어요. 그러니까 저 막지 마세요.”
순간적인 결심이라 느껴질 만큼 너무 극단적이었고, 오랜 시간 고민했을 선택이라기에는 겁을 내고 있음이 많이 느껴졌다.
“내려와서, 다시 생각해요. 거기는 위험해요.”
나무의 말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고개를 젓고 있는 여학생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이제 더 생각하기도 싫어요. 여기가 끝이었으면 좋겠어요.”
나무는 점점 더 앞으로 몸을 숙이는 여학생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다가오지 마세요. 어느 누구도 저의 죽음을 아파하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그걸 장담해요? 가족들 친구들 다 서운하게..”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했다.
“아니요. 다들 제가 죽어도 눈하나 깜짝 안 할 거예요.”
두려워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리워하는 눈빛도 가득했다.
“이리 와요. 내가 손잡아 줄게요.”
“싫어요.”
용기가 사라져 가는 것을 눈치챈 여학생은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렸다. 아슬아슬하게 나무는 손을 잡았다.
“꼭 잡아요. 내가 어떻게든 살려줄게요.”
“아.. 살려주세요. 무서워요..”
여학생은 이제야 자신의 진심을 뱉어내고 있었다.
손의 힘이 너무 들어 나무는 조금 더 기울여 여학생을 잡았다. 여학생의 간절한 눈빛이 나무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무는 급박한 마음이 사라지고 편안해지고 있었다. 중심을 놓친 나무와 여학생은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
“그 여학생은 어떻게 되었어요? 제가 못 잡아줬어요. 여기 있나요?”
마음이 급해진 나무는 어쩔 줄 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여학생은 아직 여기에 없습니다. 나무씨만 여기 왔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나무에게 온화함 가득한 인상 좋은 제안자는 다시 말했다.
“나무씨가 여기 온 이유를 전해야겠군요. 나무씨는 죽음에 가까워진 게 맞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모두가 알듯이 천국과 지옥, 아니면 환생이라는 선택권이 생깁니다. 그런데 나무씨는 한번 더 선택하게 되었어요. 나무씨는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왔더군요. 게다가 생의 마지막에 한 행동이 나무씨의 모든 가치를 배로 만들어줬어요. 그래서 나무씨의 선택권이 더 구체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나무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잘 살아왔다는 결과론적인 칭찬을 지금 이 타이밍에 듣는 게 맞다는 사실이 아직 그렇게 실감 나지 않았다. 아니,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것도 실감 나지 않았다.
“제가 드디어 잘 살아온 보람을 느끼네요. 다행이라고 해야 될까요?”
나무는 어색하게 웃었다.
“나무씨는 어디든, 어떤 모습이든 원하는 대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천국도 좋은 선택이지만, 다들 지겨워하기도 하더라고요.”
나무는 혼자서 한참을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최고의 제안이었다. 모두가 원하는 천국에서 맘 편하게 지내는 건 최고의 선택일 것 같았다. 지겨워하기도 한다는 말에 살짝 웃음이 났다.’
“그럼, 제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시나요?”
이 세상 온화함을 다 가진듯한 인상 좋은 제안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바라는 순간이 왔네요.”
어떤 좋은 선택을 결정했는지 나무는 꽤 설레어했고, 생각보다 활기도 띄었으며, 웃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저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걸로 선택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