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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Feb 29. 2016

꼭꼭 씹어먹어요, 삶

맛있게 살아요, 우리



식탐(食貪)과 식욕(食慾).


탐과 욕이라니 참 지독한 것과 붙었다고 생각했다.

먹는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어떤 대상이든 기준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먹는 일을 기준 삼으면,

먹기 위해 산다고 말하는 사람과 살기 위해 먹는다고 말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겠다.

얼핏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 같으나 먹는 행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므로 범위 안에  한정된 분류일 뿐, 범위 밖으로 분류될 수는 없다.

'먹어야 하는 존재'라는 전제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어쨌든 먹어야 하는, 다른 분류지만 같은 범주의 사람이다.

모두가 어딘가에는 속하게 되는 그런 기준이다.


요컨대 나는 세 번째 분류에 속한다. 먹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요리를 하는 일과 좋은 음식을 좋은 사람과 나누는 일을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아무래도 좋다'.










India, Kolkata (2015)





바라나시에 머물 때 늘 앉아있던 라씨 샵이 있다. 그 골목 친구들의 아지트 같던 작은 공간에 어느 순간부터 나도 당연한 듯 섞여 함께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맞은편 처마에 늙은 원숭이 한 마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척 보기에도 '나이가 많구나' 할 만큼 주름지고 지친 얼굴이었다. 그것은 시선을 똑바로 하고 내 쪽을 바라보며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곤 했다. 무엇이든 먹을 것을 쥐어줄 때까지 계속해서. 친구들은 장난스럽게 먹던 과자며 콩 따위를 건네주곤 했지만 나는 어쩐지 그 울음소리가 싫었다. 뭉툭하게 귀를 파고 들어와 신경을 벅벅 긁어놓았으므로 견디기 힘들었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참지 못하고 어느 날 물었다.


 왜 자꾸 오는 거야?  

-그녀는 늙고 굶주렸어. 우리가 뭔가 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찾아오는 거야.



비참하다.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먹이를 구할 수 없을 지경으로 지치고 병들었는데, 그렇게나 힘들고 아픈데, 그럼에도 배가 고프다는 것이. 멋 모르는 인간들의 비웃음을 받으면서까지 먹을 것을 구걸해야 한다는 것이, 장난치듯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매일 애처롭게 울어야 한다는 것이, 동정으로 생을 연장해야 한다는 것이 비참하고 무거웠다. 외면하고 싶었다. 허기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찾아와 산 것을 괴롭히는 악덕 고리대금업자 같았다.






그 후로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원숭이가 찾아오던 처마 왼쪽 아래로는 안으로 반팔 간격으로 옴폭 파인 공간이 있었다. 심하게 일그러져 위아래로 삼각형의 틈이 있었고 오른쪽 문고리도 3센티는 밑으로 치우쳐 있었다. 세 개의 계단 위로 연갈색의 문이 있었지만 잠겨 있는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 계단의 양 옆에 걸터앉아 근처에서 산 밥이나 간식을 먹고 가곤 했다. 꼭 둘이나 셋-. 그 이상은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그 공간을 좋아했다. 누구나 들러서 먹고 떠들고 쉬었다 갈 수 있다니, '친절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그곳에 할머니 한 분이 앉으셨다. 그분은 앞을 바라보지도 길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벽 쪽으로 완전히 등을 돌다. 그리고 지나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누가 볼 새라 허겁지겁 음식을 뜯어 넣기 시작했다. 그건 '먹는다'라거나 '식사'라기 보다도 '넣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몸짓이었다. 그녀의 작고 가녀린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공간은 더 이상 친절해 보이지 않았다. 혼자 먹는 밥이라는 건 왜 떳떳하지 못할까. 그녀는 왜 완전히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식'의 욕구를 해결해야 했을까. 그녀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먹는 행위에서 나오는 어떤 고독과 부끄러움을.










어쩌다 보니 하루 온종일 배를 곯은 날이 있었다. 저녁 무렵 노점이 문을 열기를 기다 에그롤을 샀다. 그걸 받아들고 털렁털렁 걸어가다가 문득 '이걸 누가 달라고 하면 줄까?' 생각해봤다. 나는 몹시 배가 고팠고 누군가 그런 요청을 해온다면 역시 곤란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해놓고 곧 소스라쳤다. 이게 뭐라고. 상상 속이었어도 고개를 저은 내가 부끄럽고 미웠다. 갑자기 아프다고 몇 일째 보이지 않는 사비나 얼굴이 떠오르고, 나만 보면 '배고파' 습관처럼 말하던 아이들 얼굴도 떠오르고.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모두가 먹고사는 문제였더라. 살기 위해 먹는 사람도 먹기 위해 사는 사람도, 실은 모두가  먹고사는 문제 위에 살고 있었다. 사는 것이 먼저든 먹는 것이 먼저든 무슨 상관이란말인가. 결국은 먹어서 살고 살아서 먹는 일인데. 결론은 그거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살아가는 것의 문제라는 것. 살아있는 모든 것이 떠안아야 하는 문제. 모든 문제의 바닥에 자리 잡은 문제.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살아있기 때문에 벗어날 수 없는 문제. 먹고, 그래서 살아가는. 살아남는, 생존의 문제. 가장 기본적이고 원시적인 욕구. 선택하거나 벗어날 수 없기에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밥 값 하라'는 말이 있다.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씹어 삼키는 행위가 비참하게 느껴진 것은 스스로 내 삶의 값어치를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나'의 가치를 의심하고 있을 때, '밥값'이란 걸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다고 느낄 때 먹어서 생을 연장시키는 일은 매번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감정을 느끼든 피할 수 기 때문에 허기는 잔혹하다.



'먹는다'는 말은 곧 '산다'는 말과 동의어 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주 천천히 먹는 일이 곧 사는 일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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