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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Mar 20. 2016

초대받지 못한 손님

이해라는 거대한 착각


시장이나 시골을 돌아다니는 게 좋아.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거든




괜한 치기가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착각인지도 몰라요.










틈틈이 이곳저곳을 떠도는 동안 나에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생겼다. 소위 랜드마크라 불리는 유명 관광지나 능숙한 한국말로 호객을 하는 맛집 같은 곳에는 좀처럼 마음도 발길도 가질 않는다. 대신 정신없고 소란한 시장바닥이나 두 사람이 겨우 비껴가는 작은 골목을 헤매거나 길에서 갓 튀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몇 번을 들어도 제대로 발음할 수 없는 이름을 가진 음식들을 사 먹곤 했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괜한 자부 따위를 가져왔다는 사실도 부정하지는 않겠다. 묘한 이질감을 애써 모른 체 하면서까지 끈질기게 나의 방식을 고수했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온전히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Varanasi, India (2016)



여행 중엔 늘 발 닿는 데로 어디까지고 걸어 다닌다.


어느 날은 갠지스의 북쪽 끝에 위치한 라즈 가뜨(Raj Ghat)에 갔다. 중심에 위치한 다샤스와메드 가뜨(Dashashwamedh Ghat)와는 5km 정도 떨어져 있다. 길을 잃지만 않으면 1시간쯤 걸은 후엔 닿을 수 있는데 멀어서인지 특별히 볼 것이 없어서인지 방문객들은 걸음 하는 경우가 드물다. 근처를 몇 번인가 왕래하는 동안 아는 얼굴이 몇 생기기도 했고, 철교를 건너는 기다란 기차를 보는 일이 좋아서 나는 종종 그곳을 찾았다.



라즈 가뜨 근방은 슬럼이다. 정해진 시간이면 사원에서 나눠주는 무료 급식을 받기 위해 늘어선 줄이 길고 골목을 걷다 보면 두 뼘짜리 디딤돌 위에 열서넛의 작은 신발이 엎치락뒤치락 쌓여있는 모양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때와 눈물이 꼬질꼬질한 아이들은 낯선 얼굴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어달라거나, 토피(Toffee)를 달라며 달려들었다. 양팔을 붙잡고 늘어지는 아이들과 별개로 일면에선 언제나 날이선 경계의 시선이 들러붙었다. 어디를 가도 무엇을 해도 누군가는 나를 주시했다. 침입자. 나는 경계와 주시의 대상이었다.


처음 그곳에 발을 들였을 때 받은 충격은 거대했다. 여행자들이 점령하다시피 한 남쪽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북쪽 슬럼가에서 말끔한 나는, 값비싼 카메라를 목에 건 나완벽한 이방인이었다. 감히 섞여들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날카롭게 쏟아지는 시선과 이따금 들려오는 조롱 속에서 그들과 나 사이에 놓인 높고 단단한 벽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동안 나는 감히 무엇과 가까워진다 생각했으며 어디에서 같잖은 자부를 느꼈던 것인가, 속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미숙한 착각이 그토록 부끄러웠던 날이 있었던가 싶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고 그대로 조금 침울해졌다. 딛고 있던 땅이 한순간 무너져내려 시커먼 심연에 빠진 기분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면 좋을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았거나 내가 모르는 단어로 표현될, 깊고 검은 감정이 나를 덮쳤다.










현지인들 틈에 섞여 웃고 떠드는 일은 즐거웠다.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지만 그 정도는 아랑곳 않을 만큼의 만족감을 주었다. 골목을 헤매면서, 상인들과 흥정하면서, 숙소 직원과 친해지면서 사람들과 가까워졌다고 느끼고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리석은 착각이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 자리는 내가 원한 자리였다.

어째서 그들은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을까.













꼬박 두 달을 바라나시에 머물며 사는 듯, 여행하는 듯 살았다. 그러면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해버린 모습에 불만을 토로했다. 여행자 드문 곳에서 호의 대신 가시 돋친 시선에 잔뜩 찔리고 돌아온 날에야 생각했다. 나는 멋대로 이들에게 '역할'을 주어놓고 충실하지 못하다며 이들을 타박것은 아닐까.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투정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을 강요한 것은 아닐까.


그들은 나를 위한 인형이 아니며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주어야 할 어떠한 의무도 다.



나는 도대체 어떤 기대를 품고 무엇을 보고자 했던 걸까, 혼란스러웠다. 변하지 않길 바라며 외면했을 뿐 변화는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내가 간섭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다. 그러니 무엇에도 투덜거려선 안 되는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입을 삐죽거리던 나는 너무도 어리석고 이기적이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바라고 있던 것, 기대했던 것을 거두어들여야 했다.

그들에겐 의무가 없었고 나에겐 자격이 없었다.










넘쳐나는 여행객이 의아해서 왜 인도를 여행하냐는 질문을 하고 다닌 적이 있다.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 싶어서'라는 답이 대부분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란 뭘까?


우리는 머릿속에 거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두고 익숙한 편견으로 여행지에서의 첫걸음을 뗀다. 생각해보자. 그렇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지는 않았나. 우악스럽게 스스로의 규격에 끼워 맞추고 알고 싶지 않은 것은 저 멀리 던져버리지 않았나. 우리에겐 이상과 환상을 강요할 권리가 없다.


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 자만이었다.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을 뿐 이해는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진실은 쓰라리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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