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著作權)은 ‘자기다움’이다.
저작권(著作權)은 저자(著者), 대상(對象), 권리(權利)로 이뤄져 있다. 저작물(著作物)은 저자(著者)의 가치와 철학, 시간이 빚어낸 경험의 서사가 씨줄과 날줄로 얽히고설킨 한 편의 기록물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아니 흉내 내도 안된다. 저자가 살아온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고유함과 독특함이 진하게 배어 있기에 유사하게 모방해서도 안될 뿐 아니라 따라 한다는 것은 더욱 안될 말이다. 저자가 사회에 던지는 함의의 깊은 속내는 저자만이 알 수 있다. 명장(名匠)마다 세세한 음식의 맛이 다르듯, 저작물의 결도 저자마다 다르다. 싱거울 수도 있다. 짜지만 끝 맛은 달콤할 수도 있다.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해석은 소비자의 몫이다. 유사하게 흉내 내거나 모방한다고 근저의 속사정까지 베낄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작권은 저자의 ‘자기다움’으로 ‘아바타’이다. 자기다움은 누구와 경쟁 관계인 ‘Best One’이 아니다. 자신만의 독특함이나 특징을 보여 줄 수 있는 ‘Only One’이다. 나무마다 잎 모양이 다르고,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이 있듯이 말이다. 바로 ‘다름’이자 ‘다양성’이다. 다름은 각자 취향에 따라 선호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맞고 틀림’의 이분법적 논리 잣대의 대상은 아니다. 독자와 저작물이 바라보는 방향이 부합할 때 따르는 무리가 생긴다. ‘팬덤(fandom)’이다. 좋아하는 것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가치관과 경험 등 성향의 차이가 시발점으로 강요의 대상이 아니다. 인격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저자의 생애가 켜켜이 쌓인 저작물 뿐 아니라 독자의 동감과 호감, 그리고 공감은 철저하게 보호받고 존중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저작권이 갖는 생명이자 인격이다.
저작권은 보호와 존중의 대상이다.
저작권은 ‘소유’이다.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다. 사유물은 법적 보호를 받는다. 태어나면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학습한 것 중 하나가 ‘남의 것’을 탐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허락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면 무단침입으로 법적 제재를 받는다. 소유권자 허락 없이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은 범법행위이다. 저작권도 마찬가지이다. 저작권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사유재산이다. 동경하거나 좋아한다고 남의 것을 탐하면 안된다. 자신이 좋아하면 소유권자에게는 더욱 소중할 수 있다. ‘아낀다’는 것은 돈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자신의 분신처럼 말이다. 그래서 소중한 것은 보호받아 마땅하다. 저작물이 무단 인용되면 ‘도용(盜用)’이자 ‘표절(剽竊)’이다. 표절사례는 구구절절 열거하지 않아도 언론을 통해 자주 마주한다. 오피니언 리더들의 사전 검증절차에서 논문이나 저작물에 대한 표절 시비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아직까지 저작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가 낮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일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시대가 도래하면서 쳇GPT의 저작권에 대한 논쟁이 뜨거운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저작권 이슈이다. 다이너마이트는 광산개발을 위해 발명되었지만 폭력에 이용되고 있고, 비행기는 공간적 이동의 제약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쳇GPT도 마찬가지이다. 검색과 기획의 편리성은 그 어느 것보다 앞서지만, 산출물은 누구에게 귀속되어야 정당한 것일까? 내년 시행을 앞둔 ‘AI 기본법’이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 사뭇 궁금한 이유이기도 하다.
‘표기(表記)문화’는 ‘남의 것’을 인정하는 마중물!
자본주의 거래는 반대급부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저작권은 소유 개념이지만 제4차 산업혁명시대의 공유와 구독경제의 대상이기도 하다. 저작권이 갖는 ‘대가(代價)’에 대해 사전에 상호 만족한다면 거래는 성사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용에 대한 사전 허락을 받아야 한다. 승락의 방법 중 하나가 ‘표기(表記)’이다. ‘표기’는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이자 떳떳하게 사용할 수 있는 행동 표현이다. 즉, 표기는 저작권에 대한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고 남의 것을 존중하는 마중물이다. 남의 것을 차용한다는 것은 ‘내 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그만큼 고마운 일이다. 비록 조연이지만 ‘내 것’이 드러나도록 음지에서 묵묵히 자리지킴이 하는 고마움에 대한 표현으로 출처를 밝히자. ‘표기’는 서로 상생의 길이자 교학상장(敎學相長)으로 사회가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는 디딤돌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는 융복합의 시대이다. 동질적 융복합은 3차 산업혁명시대의 유물이다. 이제는 이질적 융복합의 시대이다. 다름과 차이, 다양성이 융복합될 때 또 다른 ‘가보지 않은 길’이 개척될 것이다. 다만, 융복합 과정에서 ‘내 것’과 ‘너 것’을 분명히 구분하는 행동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