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세 이상 고령자의 우울증상 비율!
13.5%(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0) 국내 65세 이상 고령자가 호소하는 우울 증상 비율이다. 나이가 들수록 우울 증상은 가파른 기울기를 보인다. 85세 이상의 고령자에서는 65세 연령군의 3배에 달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다. 우울 증상은 외로움에서 비롯된다. 정보통신기술 발달로 삶은 점점 윤택해지고 편리해지는데 왜 우울해질까? 제4차 산업혁명의 혁혁한 공을 세운 디지털 발달은 초개인주의 중심의 ‘고독 사회’ 건설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일등공신이다. ‘우리’라는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 사회 구성의 가장 기초인 가족이라는 울타리도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1인 가구의 증가폭을 보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65세 이상 고령자의 1인 가구 매년 증가
37.8%(통계청, 2024) 2023년 65세 이상 전체 가구(566만) 대비 1인 가구(214만) 비율이다. 2023년말 1인 가구(783만) 기준으로는 27.3%이다.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고령자 1인 가구 증가율이다. 65세 이상 전체 가구 대비 1인 가구 비중은 2015년 32.9%, 2020년 35.1%, 2023년 37.8%로 매년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1인 가구는 외환위기 이후 2000년대 들어서면서 크게 늘어나 사회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도 15.5%에서 2015년도 27.2%, 2023년도 35.5%로 눈에 띄게 빠른 추세이다. 1인 가구는 매년 평균 1.0%p 수준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증가 요인으로는 혼인율 감소로 인한 미혼 독신가구 증가, 이혼이나 별거로 단독가구 증가, 그 어느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파른 고령화에 따른 노인 단독가구의 증가가 꼽힌다. 고령화도 1인 가구 증가 요인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외로움의 실체
외로움은 왜 두려울까? 만병의 근원이자 현대 의술에서도 예의 주시하는 치매의 발병 원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은퇴는 외로움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은퇴와 동시에 비즈니스 관계는 거의 단절된다. 직책(職責)이 사라지면서 역할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쓰임새의 종료는 자존감을 낮추고, 낮아진 자존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빗장을 지르면서 은둔형이 되기 십상이다. 은둔형은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어느덧 고령자도 한 몫 거들고 있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도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좁아진 영역은 끝내 1인 가구라는 원치 않는 사회 현상으로 내몰린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 요즘 사회 현실이다.
외로움이란 뭘까?
그렇다면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는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이다. 일반적으로 외톨이일 때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더 넓은 의미해서 외로움을 해석하고 있다. 사전적 정의처럼 단순히 홀로 되었을 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더욱 더 괴로운 것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때 상실감이다. 기하급수적 변화는 사회를 양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시대는 이분법적 논리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극히 드물다. 그 어느 때보다 다양성이 조화롭게 자리매김하는 시대이다. 비트코인이 자산 증식의 방편이 될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AI가 아바타가 될 줄 상상해 보았는가? 오늘은 어제와 다른 하루라는 것은 분명하다. 인정해야 한다. 지나 간 시간에 얽매일 필요 없다. 다가 올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 변화하는 것 만이 외로움을 피할 수 있다. 살아남는 자(者가) 강한 자(者)라는 진화론이 말하듯 말이다.
이처럼 단순히 홀로 되었을 때 외로운 것은 당연한 것 일 수 있지만,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외로움의 농도는 더 진하다. 자신이 배척 당한다는 것에 대한 쓸쓸함과 배신감은 더 깊은 한숨을 자아낼 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 마음을 헤집고 들어가면 결국 남는 것은 ‘홀로’라는 단어로 귀결된다. 허나 그 과정은 단순히 환경적 외톨이가 되는 것과 사뭇 다른 심리적 외톨이다. 흔히 얘기하는 ‘왕따’가 되었을 때가 심리적 외톨이인 것이다. 괴롭힘의 왕따가 아닌 집단지성 도출 과정에서 배제될 때 ‘왕따’가 느끼는 외로움은 더 쓰라리고 가슴을 후며 판다.
나이가 들면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나이가 들면 이웃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것을 내려놓고 남의 것의 다름과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 허나 현실은 어떠한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부르짖고 있지만 연령의 숫자와 고집의 강도는 비례한다. 자신의 뜻에 이타적 의견을 버무리는 것에 인색하다. 인색한 만큼 외로움 지수는 올라간다. 비례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나이와 경륜이다. 지식이 ‘생각’을 자아낸다면, 경륜의 디딤돌인 경험은 ‘행동’으로 배운 산 지식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행동에 책임이 따른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근원이기도 하다. 듣는다는 의미의 경청(傾聽)의 청(聽)은 ‘임금님(王)의 마음(心)으로 세상 일을 하나(一)부터 열(十)까지 듣고(耳) 바라 봐야(目)한다’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 세심함으로 화자(話者)의 의도를 이해하고 파악하려고 진심으로 애를 써야 한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맥락을 짚어야 한다. 의도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어울릴 수 있다. 어울림은 ‘흥’을 유발한다. ‘흥’은 우리 민족의 장점이기도 하다. 이타적 의견에 귀 기울임의 중요성을 깨우쳐야 한다. ‘혼자’가 아닌 ‘우리’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외로움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축적된 생활습관의 결과물이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빗장을 걸어 잠그면 스스로 ‘홀로’ 된다. 남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다. 설령 의견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틀렸다’고 하기 보다, 다름을 차분하게 설명하며, 이타적 의견의 장점과 자신의 의견을 버무린다면 늘 이웃은 가까이 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품안의 자식이라고 했다. 은퇴할 때가 되면 자녀들도 성인으로 훌쩍 성장해 있다. 자신만의 가치와 생활관으로 앞날을 꾸려 나간다. 그 앞길을 ‘내가 왕년에는’ 라떼문화가 침범한다면 자녀들이 빗장을 칠 것이다. 아버지가 서 있을 공간을 최소화하거나 아예 자리를 없앨 수도 있다. 아버지의 손길이 필요했던 자녀가 아니다. 성인으로서 사회의 일원이 된 자녀를 당당한 인격체로 대해 줄 때 수평적 대화가 이뤄진다. 대화가 된다는 것은 통념적으로 ‘말이 통한다’는 의미이다. 말은 서로 주고 받을 때 의미가 형성되고,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마중물이 된다. 마음의 문을 열자.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존중하며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