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나와는 먼일이라 여기곤 했지만 사실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누군가에겐 두려움일 것이요, 또 다른 이에겐 희망일지도 모르는 것. 바로 죽음이었다.
건물 출입문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무감각하게 현관문을 열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무감각하게 출입문 버튼을 눌렀다. 통유리 문이 열리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참새를 맞닥뜨리자마자 나는 그만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몇 번을 들여다 보아도 분명 죽은 참새였다. 침묵에 잠겨있던 감각들이 일제히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깊은 잠에 든 것처럼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는 참새의 곁에 서서 나는 발만 동동 굴렀다. 어떡해, 어떡하지 라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가야 했는데 이상하게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참새 사체 처리,라고 검색창에 입력을 하니 나와 똑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올린 질문글이 몇 개 보였다. 여러 개의 글을 읽어보아도 결론은 똑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당 지역의 동물 사체 처리과에 연락하여 수거를 접수하는 것이었다. 불현듯 작년 오월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한창 만발하던 벚꽃도 저물고 짙은 봄기운이 곳곳에 깃들어 있던 시기였다.
그때도 아이를 마중 나가기 위해 유치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차를 몰아 동네를 벗어나는 데까지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 막 고가도로 옆을 지나 합류구간에 진입하려던 참이었는데 일렬로 줄지어 서있는 라바콘 옆으로 무언가가 보였다. 마침 주변에 지나다니는 차가 없었기에 살짝 속도를 줄여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봤자 아주 잠깐 고개를 돌려서 볼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으나, 곧 나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 고양이 사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단박에 슬픔에 휩싸였다. 이때도 역시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어떡해, 어쩜 좋아.
도로 위에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쓰러져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운전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작디작은 몸에 고스란히 전해졌을 충격이 얼마나 크고 고통스러웠을지 감히 상상조차 안 되었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고, 유치원에 도착하자마자 떨리는 손으로 동물 사체 처리과에 연락을 했다. 가는 길에 관할 시청 고객센터에 전화를 하여 미리 연락처를 받아놓은 터였다.
그날의 감정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며칠 동안 힘들어했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일 년이 지나서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문자로 안내받은 담당 부서의 전화번호가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원망하며 발치에 누워있는 참새를 내려다보았다. 너는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죽어있는 거야. 담당자에게 집 주소를 알려준 뒤 나는 다시 집으로 올라가 참새를 담을만한 작은 상자를 찾아 내려왔다. 같이 챙겨 온 목장갑을 쓰고, 그 위에 비닐장갑까지 씌운 다음 참새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대로 참새를 잡아 상자에 넣기만 하면 되었는데 차마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죽었던 참새가 되살아나 나를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란스럽게 비명만 질렀다. 한참을 악을 쓰다가, 참새를 상자 안에 겨우 넣고 키친타월을 덮어준 다음 뚜껑을 닫는 것으로써 장례 절차를 얼추 마무리했다.
오후 다섯 시쯤 되었을까, 담당자에게 참새가 들어있는 상자를 수거해 갔다는 확답을 받은 후에야 나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계속 몇 시간 전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조그맣고 딱딱하던 참새를 빈 상자 속에 넣었을 때로 돌아갔다가 내가 모르는 시점으로 장면이 전환되는 것이 반복되었다.
참새는 새벽 다섯 시나 여섯 시쯤 일어나 지저귀는 것으로 하루의 시작을 알렸을 것이다. 그리고 먹이를 찾아 바삐 돌아다니거나 둥지를 고치기도 했을 것이다. 아주 지극히 평범한 날의 아침을 부지런하게 보냈을 테고, 한숨 돌리려던 참에 산책을 다녀오기로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틀림없이 열려있는 줄 알고 날아든 문이, 사실은 자기를 죽음으로 이끈 투명한 벽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참새는 둥지로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삶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건 결코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었다. 불확실한 삶을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유일하게 확실한 결말이다. 시기의 차이는 있겠으나 누구나 마지막 순간을 향해 다가간다. 나는 어려서부터 유전적인 기질과 유년 시절의 경험 때문에 남들보다 생에 대한 애착이 덜했다. 숨이 끊기기 직전의 느낌은 어떤 것인지, 죽음 이후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는지, 그런 것들을 매번 궁금해했다. 그렇지만 모순적이게도 한때는 불멸의 삶을 사는 사람처럼 살았던 적도 있었다. 이른 새벽 출근길에 나를 배웅하듯 늘어선 나무들의 싱그러움과, 내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아 마침내 봄이 왔음을 수줍게 알리는 연분홍 꽃잎들의 아름다움을 눈여겨보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런 것들이 내겐 숨 쉬는 것처럼 당연했기에 내가 원할 때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거란 착각을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영원히 살 것처럼 굴던 내가 차츰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 그건 아마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고,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관념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예전의 나였더라면 관심조차 주지 않았을 것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가령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과 구름이 감탄사가 터져 나올 정도로 예뻐 보이면 길을 걷다 말고 멈춰 서서 사진을 찍었다. 좋아하는 화가의 작품으로만 접했던 해바라기를 길가에서 마주치고는 아이보다 내가 더 신나 했던 적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오늘을 사는 나에게 세상이 주는 선물이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누리지 못했을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니 나 역시도 그 고양이나 참새와 다를 바 없다. 그저 그들보다 운이 좋았던 것뿐이다. 고양이에겐 차가 있었고 참새에겐 유리문이 있었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도 예상치 못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척 겸허해진다. 아무리 무기력이 나를 휘두르려 전력을 다해 덤비더라도 나에게 주어진 오늘을 결코 허투루 보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을 기꺼이 최선을 다해서 살아간다. 삶의 이치대로 살다 자연스레 수명을 다하든, 조금 이르게 삶을 마감하게 되든, 마지막 순간에 나의 마음에 남을 풍경들은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것들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