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소설 쓰기 기초 훈련 과제
사진 아래쪽에는 잔 하나가 놓여 있다. 지름이 길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좁아지는 형태로 하이볼 잔이나 콜린스 잔과 비슷하다. 매끄러운 컵을 집어 들자 음료와 얼음의 냉기가 손가락에 스며든다. 순식간에 손이 차가워졌다고 해서 컵의 두께가 종잇장만큼 얇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단단하고 견고하다.
잔속에는 호박색의 액체와, 무언가 흘러나올 틈이라곤 조금도 허락하지 않을 법한 크기의 얼음이 들어있다.
호박색 액체의 정체는 드립 커피다. 음료를 한 모금 들이키기 전, 나는 컵 안을 들여다본다.
호박 보석을 녹인다면 아마도 이런 느낌일까. 커피는 은은하게 비치는 햇빛을 받아 투명하고 진하게 빛이 난다. 빛의 깊이를 가만히 응시하면, 어떤 목표물에 주의를 집중하여 보고 있는 호랑이의 눈동자와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 안에는 뭉툭하게 깎인 남극의 빙산 조각이 고요히 떠 있는데 잔을 들 때마다 잔잔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빙하가 깨지는 것처럼 묵직하고 청량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 이 시각적 대비 덕분에 차가운 겨울을 한 잔에 담아 마시는 착각에 빠져든다.
유리잔 밑의 검은색 컵받침은 단순히 잔을 받치는 용도를 넘어, 잔이 테이블 위에 깊게 새겨놓은 영구적인 그림자 같다. 잔이 햇빛을 모아 빛을 발할수록 이 가짜 그림자는 더욱 선명하고 짙은 윤곽을 드러내며 실제 그림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듯하다.
컵이 놓여 있는 자리를 본다. 붉은빛이 살짝 감도는 황갈색의 테이블 겸 의자는 마치 금수목을 떠올리게 한다.
통창으로 스며든 햇빛의 손길을 타서인지 결이 비단처럼 미끄럽고 반질반질하다. 옆으로 길게 누운 채 빛을 반사시키는 것이 꼭 가구가 아니라 거울을 보는 것만 같다.
출입문으로 나가는 길에 목재 장식품이 서 있다. 다리가 네 개이고 상판은 있지만 그 폭이 손바닥 너비 정도라, 쓰임을 잃고 그저 공간의 구도를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으니 이제부터 나는 저것을 장식품이라고 부르겠다. 바로 뒤에 있는 유리창 바깥으로, 가지를 곧게 뻗은 나무가 한 그루 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싶었는데 장식품과 나무의 조합이 미술학원에서 줄곧 보아왔던 이젤을 연상시킨다. 나의 시선을 기준으로 목재 장식 바로 왼쪽 아래에는 화분이 있다. 화분은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인다. 원형 테이블의 짙은 그림자 아래에서 마치 한숨 돌리려는 사람처럼 놓여 있다. 아니, 몸을 가리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날은 좀처럼 해를 보기 어려웠던 날이어서 그런지 가까이 있던 컵과 테이블 겸 의자를 제외한 모든 사물들이 채도를 잃은 듯 옅은 명암 속에 잠겨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흑백 화면에서 잠시 색깔만 입힌 듯한 풍경이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21분이 지난 지금, 슬슬 연필을 굴리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드립 커피다. 손님이 커피를 주문한 지 얼마 안 있어 나는 산산이 부서지며 새로운 생명을 얻는 듯한 짧은 고통을 느꼈다. 주인장은 미리 물로 적셔놓은 여과지에 나를 담더니 뜨거운 물을 아주 천천히 부었다. 인간 입장에서는 섬세하게 커피를 내린다는 표현이 맞겠고, 내 입장에서는 뜨거운 물이 나를 짓눌러 내 몸 안에 잠들어 있던 산뜻한 향이 밀려 나왔다고 하는 것이 어울리겠다.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다행히 거대한 바위 같은 얼음이 잔 안에 자리 잡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덕에 나는 이 뜨거운 여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윽고 내가 컵에 가득 채워지고, 나는 손님과 만나게 되었다. 오늘 나를 마시게 될 사람은 여자였다. 중단발 머리에 헤링본 재킷, 중청 데님을 입은 그녀는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만족스러운지 작은 탄성을 지르고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나는 산미가 강하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서 마시는 편이 좋다는 주인장의 말을 충실히 지키려는 것 같다. 아무튼 나는 손님이 책을 읽는 동안 주위를 돌러보았다. 투명한 유리잔이라 바깥이 선명하게 잘 보일 줄 알았더니 웬걸, 온통 흐리기만 하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깊고 푸른 바다 밑바닥에 와 있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니 최대한 눈 안에 들어오는 것들을 그려봐야겠다.
인간의 걸음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그러니까 정확히 출입문 근처에 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 나무는 내가 평소에 알고 있는 나무와는 영 생김새가 딴판이다. 우선 뿌리가 네 개다. 내가 알기로는 나무는 보통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던데, 이 나무의 뿌리는 땅 위에 서서 가로로 쭉 뻗은 나무를 떠받치고 있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 돌연변이 나무가 등지고 있는 유리창 너머로는 또 다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젓가락 같이 생긴 나뭇가지 네 개가 공평하게 둘씩 짝지어있다.
돌연변이 나무 옆에는 화분이 하나 있다. 화분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안고 정체불명의 우산 아래에 서 있다. 아니, 사실은 우산이 아니라 파라솔인가. 우산대가 왠지 한 손에 잡힐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주인장만이 이 사물들의 진짜 이름과 용도를 알겠지. 아무튼 우산인지 파라솔인지 모를 사물 가까이엔 출입문이 있다. 주인장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과 강아지들이 저 문턱을 넘나들었다. 나는 저 문을 평생 넘어볼 일이 없을 것이다. 바깥세상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런 수수께끼를 궁금해하며 정신을 빼앗긴 사이 나는 어느새 컵의 절반만 남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나를 마시는 사람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였다.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혼자 마시는 커피, 매장 안을 가득 메우는 재즈 연주곡, 그리고 책까지. 이 네 가지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 사람은 틀림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내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이 글도, 이 평화로운 관찰도 끝이 날 것이다. 부디 이 순간이 오래 지속되도록, 나를 마시는 이가 시간을 두고 천천히, 더없이 느리게 나를 음미해 주면 좋겠다.
(*강의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브런치 매거진에 올릴 때는 1차 수정을 거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