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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가 열어준 아침

미야의 글빵 연구소 졸업 작품

by 유연


처음엔 그저 장난감이겠거니 했다. 바로 아래층에 두 살 난 아이가 살고 있어서 얼핏 보았을 땐 아무런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주인에게 가져다주어야 하나, 하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깜짝 놀라 그대로 멈춰 서버렸다. 출입문 근처에 떨어져 있던 것은 바로 장난감이 아닌 참새였다. 몸집을 보니 아무래도 새끼 참새는 아닌 것 같았고, 깃털의 색이 옅은 회갈색인 걸로 봐서는 어미 참새일 거라 짐작만 하였다.

아이의 하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지나치면 녀석의 새끼들은 어쩌나. 둥지에서 어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새끼 참새들을 떠올리며 나는 곧장 행정기관에 전화를 걸었다.

“일어나. 일어나서 얼른 새끼들한테 가야지.”

참새가 금방이라도 깨어나서 훨훨 날아가주길 바랐지만 녀석은 결국 눈을 뜨지 못했다.


작년 봄에는 운전을 하다가 차에 치여 쓰러져 있던 고양이를 보았다.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누워있는 고양이의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그때도 내가 고양이를 위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은 전화 한 통과, 고양이가 편히 잠들길 바라는 기도가 전부였다. 일 년이 지난 지금은 참새를 위해서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장면들이 나에겐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 남았다.


참새를 수거해 갔다는 담당자의 전화를 받은 후에야 나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차갑고 딱딱했던 참새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눈을 감고 잠들어 있던 참새에게서 고통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떨어져 있었던 위치를 보았을 때, 아마도 통유리로 만들어진 출입문에 부딪혔던 건 아닐까 했다. ‘아침부터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찾아 헤매다가 사고를 당했던 것일까?, 혹시 오늘 아침에 우리 집 창가에서 나를 깨워준 녀석들 중 하나였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었다.


“일어나, 아침이야. 잘 잤어?”마치 작은 종소리처럼 맑고 청아하게 골목에 울려 퍼지는 참새들의 지저귐 덕분에 오늘 아침도 가까스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어제와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아침. 맥없이 일어나 커튼을 젖히니 전선 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 참새들이 보였다. 아침부터 뭐가 그리 신나고 좋은지 참새들은 쉴 새 없이 짹짹거리고, 톡톡 튀어 다니며 자리를 옮겨 다녔다. 그 모습이 꼭 소풍을 나온 어린이집 아이들을 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새가 한때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수십 년 전, 저 작은 몸이 곡식을 축낸다는 이유로 온 나라의 적이 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면 들판에 허수아비를 세워 참새가 오지 못하게 막았고, 냄비와 꽹과리를 두드리고 공포탄을 쏘며 참새들을 쫓아냈다. 삶의 터전을 잃어간 참새들을 점차 보기가 어려워졌다. 메뚜기의 천적인 참새가 사라지자 오히려 메뚜기와 벌레들의 피해가 늘고 곡식의 생산이 줄어들었다. 참새를 없애니 식량 생산이 줄어 인구가 감소하는 나라도 있었다. 참새는 자연 생태계의 먹이사슬과 균형을 잡아주는 소중한 새일뿐 아니라 나에게도 정다운 벗이었다.


참새의 마지막 아침. 녀석은 평소처럼 고요한 골목길을 누비며 내게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전선 위에 앉아 수다를 떨면서 아침을 열었을 것이다. 먹이를 찾으러 떠나기 전 친구들과 잠시 쉬어갈 때, 뽀얀 수증기와 함께 터져 나오는 구수한 밥 짓는 냄새에 새끼들을 떠올리곤 날갯짓을 했겠지. “아이들에게 밥 줄 시간이야,” 하면서.


또다시 먹이를 찾으러 떠난 길, 하필 그날따라 먹을 게 보이지 않아 다른 길로 들어온 것이 화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골목 안으로 깊숙이 날아들 때까지만 해도 상상이나 했었을까. 아무것도 없는 줄 알고 날아들었던 유리문이, 사실은 자기를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이어주는 벽이었다는 걸. 어제의 일이 무색하리만큼 평온한 골목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어제의 나에게 시선을 두었다. 이토록 무심하고 덧없는 삶의 경계에서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나는 정녕 나의 오늘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었나.


육아를 하면서 나만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목표를 하나 둘 이뤄나가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한없이 작아졌다. 아무리 아이를 잘 키워도, 엄마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니 칭찬은커녕 어른들에게 잔소리라도 안 들으면 다행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일을 매일 해야 한다는 건 끝없이 바위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오늘을 억지로 버텨내야 한다는 의무감과 지루함으로 하루하루를 채웠다.


나는 어릴 적부터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부모님, 무관심했던 할머니들. 그 누구도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생각은 매일 아침 나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또 눈을 떴구나. 온몸을 짓누르는 좌절감에 억지로 눈을 감으려 할 때, 창문 너머로 참새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잘 잤어? 부지런한 참새들의 아침 인사는 절망 속으로 빠져들던 나를 구해주었다.


더위가 한껏 기승을 부리던 오늘, 좀처럼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열기만큼이나 나의 우울감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언제까지 살아야 하나. 삶에 대한 의욕이 점점 사그라들던 내게 있어서 참새는 삶의 무심하고 덧없는 실제 그 자체였다.


어미 참새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나라고 참새와 다를 게 있을까. 만약 내가 당장 내일 세상을 떠난다면, 그리고 그 사실을 미리 알게 된다면 삶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조금은 달라질까. 아마도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열댓 번은 불러야 겨우 일어나는 아이를 진득하게 기다려주는 여유를 부릴지도 모른다. 아이의 이유 없는 투정에 ‘너도 오늘 하루가 힘들었구나’, 하며 조용히 안아주고, 아이가 편식을 할 때 으름장을 놓는 대신 엄마의 사랑을 듬뿍 담은 요리의 맛이 어떠냐며 너스레를 떨기도 하겠지.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서 휴대폰 속 사진을 들여다봤다. 아이 엄마답게 사진첩에는 아이의 사진이 가장 많았다. 코스모스 꽃밭에서 화사하게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웃음이 났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하루 안에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반짝이는 순간들이 녹아 있었다. 지루함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했던 삶의 조각들이었다.


반짝이던 삶의 조각들은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풍경들을 다른 시선으로 비춰주었다. 푸르른 하늘과 넘실대는 구름에 감탄하고, 액자에서 걸어 나온 듯한 해바라기를 길가에서 마주치면 한참을 보고 섰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누리지 못했을 아름다움이었다. 그제야 참새들의 부지런함이 달리 보였다.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이며, 웃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큼 귀한 일도 없다고. 그러니 너의 하루는 한순간이라도 소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참새가 내게 말해주는 듯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동이 트기 전에 눈을 떴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일찍 일어날 수 있었던 건 매일같이 창가로 날아와 나를 깨워주는 참새들 덕분이다. 느린 손으로 분주히 아이에게 먹일 음식을 마련하고, 백 번은 족히 넘었을 등굣길을 아이와 손을 맞잡고 걸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구하는 참새의 수고로움이나, 내가 아이를 위해 식탁을 채우려 재료를 느릿느릿 손질하는 애씀은 서로 닮아 있다. 작은 둥지 안에서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새끼들을 바라보는 일, 그것이 참새에게는 커다란 보람일 테지. 내가 아이를 돌보며 충만함을 느끼는 것처럼.




오후 한 시 사십 분. 학교 운동장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문 앞을 서성이다가 문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오고 있었다. 행여나 아이를 놓칠세라 까치발까지 하고서 교문 너머로 아이의 모습을 찾던 그때, 그 많던 아이들 틈에서 단번에 내 아이를 알아보았다. 쏟아지는 햇살에 반짝이던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미소 짓게 하는 아이는 하루를 다시금 살아내게 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어미 참새가 열어준 아침은 작은 것들에 대한 사랑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엄마!”







살아오면서 뭐 하나를 잘 해낸 기억도, 상을 받더라도 어른들께 칭찬을 받아본 기억도 없었습니다.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는 아이의 꿈을 응원해 주고, 함께 아이의 꿈을 들여다보아도 정작 나의 꿈이 뭐였는지는 스스로도 궁금해하지 않았죠. 꿈을 꾸는 것조차 사치라 여겼고 현실에 맞춰 살기 급급했던 제가 우연한 기회에 글을 쓰기 시작하고 좋은 작가님들과 하나둘 인연을 맺기 시작하면서, 나도 꿈이란 걸 꾸어도 괜찮을까, 하는 작은 소망을 마음에 품어보았습니다.


한 달 가까이 졸업 작품을 퇴고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나의 서사를 구체적으로 담되 쓸데없는 문장은 빼야 하고, 여운을 남겨야 할 땐 직접적으로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것, 수필을 쓸 때 필요한 기술뿐만 아니라 글을 쓸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고,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도 배웠습니다. 그동안 몰랐던 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나를 너무 몰랐구나. 제 마음속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많이 미안하기도 했고요.

많이 서툴고 엉성한 글을 진심으로 봐주시고 이끌어 주신 미야 작가님, 김운 작가님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또한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제 글을 읽어 주시는 작가님들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을 써서 저뿐만 아니라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많은 분들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오래오래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참새가 열어준 아침 원글)

https://brunch.co.kr/@opallios/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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