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베닉스 젖병세척기 개발 과정의 기록
내가 하루를 낳았던 23년 1월 즈음만 해도 젖병세척기가 없었다.
하루는 세척 난이도 극상으로 악명이 높은 닥터브라운 젖병을 사용했는데
매일 하루에 5~6개의 젖병이 쌓였고, 하루를 재우고 난 뒤에 쌓아 둔 젖병을 세척하는 게 나의 밤 루틴이었다.
평생 써본 적 없는 가느다란 브러시로 닥터브라운 젖병의 내부 구조물을 차근차근 세척한 뒤에는
스팀기로 살균을 하고, 스팀과 건조가 다 되고 나면 UV 살균기에 보관을 했으니
젖병을 세척하는 데에만 들이는 공이 어마어마했다.
스팀기, 살균기까지 놓아야 하는 나의 맘마존이 비좁았던 건 말해 뭐 해다.
고백하건대, 매일 밤 눈을 퀭하니 뜨고 닥터브라운의 내부 구조물과 젖꼭지를 세척할 때에는
나도 몰래 짜증이 차오르기도 했다.
젖병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면 설거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오산이었다.
하루는 두 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빨대컵을 사용하고 있다.
빨대컵 구조물이 어찌나 복잡한지.. 닥터브라운 젖병 만큼이나 세척하기 번거롭다.
그래서 지금도 (설거지옥까지는 아니어도) 하루의 물병 세척은 상당한 귀찮음의 영역으로
나의 밤 숙제처럼 남아 있다.
작년 여름 즈음,
시중에 젖병세척기가 출시된 걸 보고 '세상 참 좋아졌다-', '나도 있었으면 도움 좀 받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기억에서 잊혀졌는데
앳홈에 조인하고 보니, 젖병세척기를 개발 중인 게 아닌가?
있었으면 무조건 샀을 제품,
구비하면 무조건 육아의 질이 올라갔을 것 같은 제품을 내가 출시한다니 처음부터 신이 났다.
우리 젖병세척기는 이미 시중 제품들의 대표적인 문제점을 개선한 Spec으로 개발되고 있었다.
젖병 4개 세척에 최적화된 시중 제품과 달리,
하루에 나오는 평균 젖병 개수 6개 용으로 준비하는 것이 가장 큰 차별화 포인트였다.
디자인은 앳홈의 디자인 Principle을 기반으로 간결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진행되었고,
디자인이 어느 정도 fix된 상황에서 세부적인 기능을 구체화해야 하는 단계였다.
나는 먼저
1. 시중 제품들에 쌓인 수천 개의 후기를 모두 꼼꼼히 살펴보고
2. 내가 젖병을 세척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불편했던 점들을 되짚어 봤고
3. 과거부터 현재까지 직접 육아 가전들을 사용해 보면서 개인적으로 불편했던 점들을 리스팅 해보고
4. 마지막으로, 대기업 식기세척기(이하 식세기)의 고가 라인 기능을 검토해 보는 방식으로
Target Spec을 구체화했다.
시중 제품 후기를 살펴보는 단계에서부터 개선해야 하는 점들은 명확하게 보였다.
시중 제품은
처음 주목했던 젖병 4개만 세척되는 용량으로는 부족하는 점을 더불어,
(닥터브라운 젖병의 부속품까지 넣으면 2개가 겨우 세척된다는 점은 숨어있는 불편한 포인트!)
젖병의 모서리나 굴곡진 젖꼭지의 사각지대에 분유 찌꺼기가 남는 점.
젖병의 물기가 바짝 마르지 않는 점.
젖병뿐만 아니라 제품 내부의 물기도 마르지 않는 점.
수압이 섬세하지 않아 젖꼭지가 쉽게 뒤집어져서 건조 후에도 물이 고인다는 점.
특히 2층 트레이에 놓은 부속품은 세척력이 더욱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점.
스팀이나 건조 기능만 따로 작동시킬 수 없는 점.
기본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상담원 연결이 제대로 되지 않는 AS 상의 문제점까지.
이런 Pain Point들은
닥터브라운 젖병 기준 6개까지 한 번에 세척할 수 있는 최적화된 용량과 수납 구조,
섬세한 물줄기의 방향과 수압/온도 설정, 건조하는 방식과 배수되는 구조의 개선,
스팀 기능이나 건조 모드만 따로 사용할 수 있는 주 사용 모드의 세분화 등으로
개선 방향을 잡아갈 수 있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Function 상의 문제점과 AS 등 서비스 품질만 개선해도
이미 시중 제품 대비 확실한 경쟁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
하지만 내 사명을 담은 브랜드의 첫 번째 제품이기에,
마치 "내 아이를 먹일 수 있는 음식만 serving 합니다."라는 요리사의 심정으로
내가 둘째를 낳는다면 직접 사용해야 하는 제품이라는 기준 하에
한치의 아쉬움 없이 제품을 완성하고 싶었다.
단순히 현존하는 젖병세척기의 기능을 개선하는 데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기타 모든 육아 가전을 사용하면서 느꼈던 아쉬움이나
가장 유사한 매커니즘인 식세기 기준, 현존하는 모든 제품 기능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고민의 레이어를 만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 촘촘히 더했다.
기타 모든 육아 가전들을 사용해 보면서 느꼈던 불편했던 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제품 세척이 너무 어렵고 번거로웠다는 점.
특히 분유제조기는 세척하는 게 늘 숙제처럼 느껴졌던 기억이다.
분유를 직접 제조하는 불편함과 분유제조기를 세척하는 불편함이 가히 맞먹을 정도 ..!
세척하는 날은 제품을 아예 몇 시간 동안 사용할 수 없으니 한 달에 두세 번씩은 무용지물이 되는 날도 있었다.
가습기 세척은 여전히 너무 불편하고 찝찝해서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내부 부품 분리 세척 안되는 영역이 많아서 본체 그대로 세척 해야 하는데
전자 제품은 물에 닿으면 안 되기 때문에 제품을 열심히 들어 옮겨 섬세하게 세척해 줘야 하는 것도 불편하고
그렇게 세척 한들, 손에 닿지 않는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는데 어떻게 위생 관리가 되는 건지 끝까지 찝찝할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 제품은 무조건 내부 부품이 모두 분리 세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분유 찌꺼기와 잔여 세제가 통과하는 필터망은 무조건이거니와
물줄기를 섬세하게 설계하며 노즐 구조가 복잡해질 것이기 때문에 노즐 분리도 필요했다.
물 보충통도 마찬가지.
이전 조직에서 텀블러를 오래 담당해 본 나로서는 물 때가 우려되는 구석 끝까지 손이 닿아야 안심이 되었다.
(디자인만 신경 써서 입구가 좁은 텀블러 극혐한다.)
물 보충통은 팔목이 두꺼운 남자들도 깊숙이 손을 넣어 세척할 수 있도록 입구를 넓혔고
손을 넣고 빼는 과정 중에 뚜껑이 거슬리지 않도록, 뚜껑은 완전 탈부착이 가능하도록 설계했다.
사실 이러한 세척 방법 보다 절대적으로 마음이 불편했던 건,
대부분의 육아 가전들아 1년 후에는 버려진 다는 점이었다.
위에 설명한 대로 나는 전 직장에서 텀블러를 담당했던 이력 덕분?에,
버려지는 쓰레기에 대한 불편한 의식이 큰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가전제품을 1년만 쓰고 버려야 한다는 사실은 꽤나 마음을 불편하게 했었다.
게다가 나는 젖병 시기를 지나 .. 27개월 하루를 키우면서 여전히 빨대컵을 세척하며 고생을 하고 있었기에
번뜩, 수납 구조를 구체화할 때 젖병 시기를 지나 빨대컵과 텀블러 시기가 올 때까지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구조를 설계하면 제품 사용 주기가 길어질테고, 우리 제품은 1년만에 버려지지 않을테니까.
마지막으로 대기업 식세기 모든 제품을 스터디 하면서 젖병세척기에 추가되면 좋을 기능들에 대한 다양한 인사이트를 얻었고 우리 제품에 반드시 구현되어야 하는 기능으로 세 가지를 접목했다.
하나는 스팀 불림 모드.
고가의 제품은 눌어붙은 밥알이나 양념, 기름때를 확실하게 분리하기 위해 스팀 불림으로 세척을 시작한다.
분유 찌꺼기가 남는다는 기존 제품의 한계는 사용자들의 가장 큰 Pain Point였는데,
이를 헹굼 단계의 온도나 수압뿐만 아니라 고온의 스팀 불림 모드를 적용하여 보완했다.
두번 째는 플로어 디스플레이.
대형 식세기들은 도어를 열지 않아도 남은 코스의 동작시간이나 식기세척기의 상태 정보를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정보를 디지털로 표기해 준다.
젖병을 세척하면서도 급하게 젖병이 필요한 순간들이 분명 생길 텐데
세척 단계나 남아 있는 시간 등을 눈으로 보여주는 방식이 육아하는 부모에게는 훨씬 직관적이고 편할 것 같았다.
인사이트를 얻어 다른 방식으로 구현한 우리 젖병세척기만의 유일무이한 기능은 '안심저온모드' 다.
삼성의 고가 라인 식세기에는 '식기만 따뜻하게 데워주는 모드'가 있다. (건조 코스의 다른 설명일 뿐이지만)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일 수 있으나, 우리 제품 타겟에 맞는 특정 '식기'나 '용도'에 최적화된 세척 모드를 접목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생활용품 제조회사에 오래 몸담았던 이력으로, 각종 물병이나 식기 소재에 대해서는 전문가 수준의 이해가 있었다.
주로 사용되는 젖병 소재는 PPSU로 100도 스팀으로 살균해도 문제가 없지만
물병 소재로 자주 사용되는 PP나, 간혹 아이들 식기에 사용되는 ABS나 멜라민 수지 소재는 스크래치가 나면 높은 온도에서 환경호르몬 등 유해물질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특히 우리 제품은 물병이나 식기까지 세척 가능하도록 설계해서 5년 이상 사용을 권장할 수 있기 때문에 열에 취약한 소재에도 안전하게 세척할 수 있는 모드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고안한 모드가 '안심저온모드'이다.
이 모드는 의도적으로 최고 세척 온도 55°C, 최고 건조 온도 50°C로 세팅하여
온도에 민감한 모드 소재에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접목했다.
하나씩 Spec을 정교화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제품 원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따져볼수록 타협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고 이 부분은 대표님의 의사결정이 필요했다.
이런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오너의 경영철학이 주요할 수밖에 없는데,
다시 한번 정호님과 앳홈에 베팅 한 나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확인받는 시간이었다.
이익보다는 제품의 완성도와
실제 소비자들이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을 온전히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 아래
욕심을 낸 만큼, 욕심을 낸 것 이상으로 제품의 완성도는 점점 높아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