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글리 시스터> 리뷰
<어글리 시스터>는 바디 호러 장르의 영화로, 유리 구두에 자신의 발을 맞추기 위해 발가락을 잘랐다고 하는, 신데렐라의 의붓언니의 이야기를 소재로 제작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흥미로운 서사 구조를 가진 작품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소재로 했기 때문에, 관객들은 영화가 어떤 결말로 끝이 나게 될지를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글리 시스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원전에 더해 이 영화가 무엇을 더 보여주고자 하는지, 그리고 익숙한 이야기를 어떠한 방식으로 새롭게 풀어내는지 일 것이다.
<어글리 시스터>의 도입부는 낭만으로 가득 차있다. 율리안 왕자가 사랑에 대해 쓴 시,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떠올리게 하는 여주인공 엘비라의 머릿속 환상, 레베카와 오토라는 남녀가 재혼 장면은 우리가 어릴 적 봐오던 동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 동화 같은 낭만은 이어지는 장면에서 오토가 죽음을 맞으며 곧바로 깨지게 되고, 인물들은 낭만이라는 포장지 아래에 숨겨져 있던 불편한 현실 — 오토와 레베카의 결혼은 사랑이 아닌 돈을 위해서 이뤄진 것 — 과 그대로 마주하게 된다. 관객들은 오프닝부터 '미'(美, 낭만)과 그 속에 숨어있는 '추'(醜, 불편한 현실)이 섞여있는 세계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미'와 '추'가 섞여있는 세계를 보여주는 연출 방식은 인물들의 속성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있다. 먼저, 여주인공 엘비라는 '왕자와의 결혼'이라는 목표를 위해 아름다운 외형을 갈구하는 인물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엘비라는 아름다운 외형을 얻는 데 성공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저변에는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추한 것들이 있었다. 그녀는 코와 눈의 미용을 위해 큰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고, 살을 빼기 위해 촌충을 삼켜야 했다. 원작의 '신데렐라'에 해당하는 아그네스 또한, 원작에서 보이는 것처럼 전형적인 피해자 혹은 선한 인물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형 덕분에 모두의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마부 '이사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을 뿐 아니라, 시종일관 엘비라를 멸시하거나 견제하는 등 추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그녀의 드레스조차도, 추한 겉모습을 가진 누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듯 겉으로 보이는 미, 그 저변에 깔린 추라는 설정은, 두 여성이 계속해서 갈망하는 남성 '율리안' 왕자에게도 적용된다. 그는 아름다운 외모, 그가 쓴 낭만으로 가득 찬 책에 의해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지만, 사냥을 하던 도중 오줌을 싸다가 엘비라에게 엉덩이를 보이고 그녀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는 등, 결코 아름다움으로만 차있는 인물은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세계를 이루는 두 속성 —'미'와 '추' — 중에서, 작중 인물들의 눈에 들어오는 건 '추' 보다는 '미'라는 것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낭만이라는 '미'에 의해 불편한 현실이라는 '추'가 가려져 있었듯이, <어글리 시스터>의 세계에서는 시종일관 '미'가 '추'를 보이지 않게 가리고 있는 역할을 한다. 엘비라가 무도회에 나타났을 때, 많은 남성들은 그녀가 해왔던 추한 행동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녀의 외적인 아름다움에만 몰두한다. 아그네스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마지막에 율리안 왕자의 선택을 받지만, 율리안 왕자는 그녀에게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율리안 왕자 또한, 엘비라에게 아름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줌에도, 여전히 그녀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 그리고 주요 인물들의 측근들은 인물들의 '미'와 '추'를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세계에 속한 많은 인물들은 그렇지 못하다. 겉으로 보이는 '미'에 현혹되어, '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결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왜 엘비라는 몰락하고 아그네스와 율리안 왕자는 맺어질 수 있었을까? 그것은 엘비라와 아그네스의 태생적 외모의 차이로부터 기인한다. 엘비라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타고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미'의 아래에 깔리는 '추'를 더 늘림으로써, 외적인 아름다움을 강화하는 전략을 택한다. 그러나,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추함이 커진 순간, 동시에 더 이상 내적인 추함을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치환할 수 없게 된 순간, 그녀에게는 추함만이 남는다. 엘비라와 반대로, 아그네스와 율리안 왕자는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굳이 추함을 늘려서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꿀 필요가 없었고, 추함을 감춘 채 아름다운 모습으로 상대방과 맺어질 수 있었다. 엘비라는 자기 자신을 파괴해 가면서 아름다움을 갈망했지만, 끝내 선천적인 한계를 넘지 못한 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글리 시스터>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발가락을 자르는 장면, 눈 수술 장면 등 시각적으로 잔인한 장면들이 아니라, 누군가가 스스로를 완전히 파괴해 가면서 노력해도 선천적인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그 이야기 구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이 절망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한줄기 희망의 빛도 존재한다. 그 빛은 엘비라의 동생 '알마'로부터 온다. 그녀는 이 세계에서 다른 인물들이 '미'의 아래에 깔려 있는 '추'를 보지 못하는 것과 달리, '추'를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다. 처음 엘비라가 촌충을 보여줬을 때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엘마는, 마지막에 그녀에게서 촌충을 뽑아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에 엘비라를 데리고 저택을 나서는 것도 엘마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알마 또한 완전한 구원자로서 작용하지는 못한다. 그녀가 엘비라를 데리고 나섰을 때, 엘비라는 이미 추한 모습만 남아버린 상태였다. 알마가 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마지막 목숨만 겨우 부지하게 뜸한 것뿐이었다. 촛불 하나로는 깜깜한 어둠을 완전히 밝힐 수 없듯이, 알마라는 존재 하나만으로는 이 세계에서 타락해 버린 사람들을 완전히 구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글리 시스터>를 보고 나면, 아름다운 이미지보다는 추한 이미지가 강렬하게 뇌리에 남는다. 하지만,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은 추한 이미지를 보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아름다움만이 들어온다. 영화는 현실에서 아름다운 모습만 보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그 밑에 깔려있는 것들이 얼마나 추한지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어글리 시스터>에서 관객들을 질리게 만드는 것은 잔인하고 끔찍한 이미지들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아름다움의 밑에 깔린, 보이지 않는 추한 것들의 실태 아니었을까.
*공모전 제출 용으로 이전에 써두었던 글을 지금 업로드함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