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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

by 조종인
AHXB5XIMVRG65F22QZKGXO3AAU.jpg?auth=858994a854c82b348c4e5257cad6bb09d28fb99567926ea049213dbbb7fd7298&width=616 이미지 출처 :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3/11/01/7BLOJT4WCJAMXKA6IKBG2QK44M/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그는 1949년 출생의 일본 소설가로, 현시대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임과 동시에,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일본 작가 중 하나이다.


그의 나이가 이제 7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보니, 돌아가시기 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실 이전에 필자가 하루키 관련 글에서 쓴 적이 있듯이,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줄 거였으면 진작에 주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면 하는 기대도 현재는 반 정도 체념 상태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노벨문학상하면 작가로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영예가 아닌가. 그렇기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에게 그 ‘최상의 영예’가 주어지길 바라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잡설은 이쯤 하고, 오늘은 내가 하루키를 왜 좋아하는지 '간단하게' 말해보고자 한다.

물론 간단하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실제와는 다른, '오차'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루키가 본인의 작품들에서 매번 강조하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그 '불완전함'.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그 불완전함과 마주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이유는 실로 간단하다. 하루키가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쓴 이유와 동일하다. 그의 단편 <반딧불이>를 읽고 나서, 불현듯 이 글이 쓰고 싶어졌다. 정말 그뿐이다.



1. 불가해(不可解) 성의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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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이 편지를 몇백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한없이 슬퍼졌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내 눈을 말끄러미 바라볼 때 드는 느낌과도 같은, 어찌할 바 모르는 슬픔이었다. 나는 그런 기분을 어디로 가져갈 수도, 어디에다 넣어둘 수도 없었다. 그것은 바람처럼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몸에 걸칠 수조차 없었다. 풍경이 내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들이 하는 말들은 내 귀까지 닿지 않았다.

(<반딧불이> 中)


고통의 가장 큰 특징은 겪는 이에게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내 새끼손가락에 난 작은 상처 하나가, 죽을병에 걸려 신음하는 자의 고통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의 크기/정도를 비교하려는 시도는 대게 실패하기 마련이다. 자신과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사람을 만나면 처음에는 반갑다. 그 순간에는 고통이란 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고, 보편성 또한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서로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공통점이 아니라 차이점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리고 최후에는, 내 고통은 아무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不可解)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하루키는 이 고통의 불가해성과,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않은 인간들의 '연대' 속에서 피어나는 소통의 가능성을 다양한 언어로 표현해 내는 사람이다. 어떠한 단어로도, 어떠한 문장으로도 내가 가지고 있는 고통의 정도를 타인에게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다. 그래서 하루키는 그 불완전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택한다. 혹자는 언어라는 다트를 통해 고통의 과녁 한가운데를 정확히 조준하는 예술가를 원할 것이다. 혹은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고통마저 생생히 체험하게 만드는 묘사력을 가진 작가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런 분들에게 하루키는 적합한 작가가 아닐 것이다.


비닐장갑.png


일반적인 작가들이 고통을 아주 섬세하고 따뜻하게, 혹여 망가지지는 않을까 조심조심 만지고 있다면, 하루키가 고통을 다루는 손길은 투박하고 차갑다. 분명히, 그 손길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의 손길이 우리의 상처 위에 닿는 순간, 그 냉기 속에서 그가 겪어온 고통이 나에게 일부분 전이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예술이란 감정을 어루만질 때 손에 착용하는 장갑이다. 우리는 그 장갑 덕분에 감정이 세우고 있는 가시에 찔리지 않을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감정의 본질에 직접 닿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예술 작품에서 전달하는 감정과 실제 감정의 본질에는 필연적으로 간극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반면, 하루키의 작품은 비닐장갑과 같다. 비닐장갑은 일반 장갑과 비교했을 때, 모양새도 볼품없고 장갑으로써의 구실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 장갑을 썼을 때 보다, 비닐장갑을 썼을 때 고통이라는 존재의 촉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된다. 고통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공유될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기게 되는 것처럼, 하루키의 작품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고통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2. 반딧불이가 내는 불빛처럼,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작은 빛.

반딧불이.png


반딧불이가 사라진 후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감은 눈의 두터운 어둠 속에서, 그 약하디 약한 빛은 마치 갈 곳을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고 떠돌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그런 어둠 속에 가만히 손을 뻗어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조금 앞에 있었다.

(<반딧불이> 中)


하루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통의 절대성과 불가해성 때문에 고통받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대고 있다. 쉽사리 바깥으로 내보일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스스로의 안에 존재하고 있는 그 고통 때문에 그들은 점점 삶의 의지를 잃어간다. 죽음을 숫자 0, 살아 있음을 숫자 1에 빗댄다면 그들의 삶은 0은 아닐지언정 1보다 0에 더 가깝다. 죽음의 그림자는 그들의 집 주위에 살고 있는 껄끄러운 이웃과 같은 존재여서, 피하고 싶지만 항상 그들의 주위를 맴돌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한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어둠의 커튼이 모든 빛을 차단한 것만 같은 때, 반딧불이가 내는 빛처럼 작게 반짝거리는 빛이 그들의 앞을 스쳐 지나간다. 분명히 그 빛은 쉽게 손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손안에 가둘 수 없기에 그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작은 빛은 그들의 손가락 조금 앞에 명백히 '존재한다'. 하루키의 세계에서 인물들에게 찾아오는 구원은 이 작은 빛과 같다. 잡으려 하면 잡을 수 없지만 확실하게 내 앞에 있는 그 존재. 그 때문에 인물들은 영원히 희망을 잃지 않게 된다.


태양.png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성직자이자 화가인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신의 침묵 앞에 절망하지만, 결국 본인과 같은 불완전한 인간이 두려움과 고뇌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구원을 얻게 된다. 하루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생의 의지는 인물들 간의 연대 속에서 피어난다. 어떤 말로도 내 진심을 다 표현할 수 없음에도, 내 곁에 머물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나를 떠나가는 상실의 고통을 겪는다 하더라도, 너무나 강한 힘에 짓눌려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무력감에 시달린다고 해도, 그들은 살아남고자 한다. 언젠가 그들 앞에 놓인 작은 불빛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빛덩이를 이루길 바라며. 그 빚덩이가 태양이 되어 모든 어둠을 몰아내주기를 바라며.



마치며

XL 하루키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미지 출처 : yes24)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

(...)

뭔가를 쓰려고 하면 언제나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은 너무나도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결국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요양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요양을 위한 사소한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정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정확한 언어는 어둠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버린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中)


하루키는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첫 페이지를 넘겼을 때, 독자는 곧바로 절망적인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어떠한 감정도 완벽하게 언어로 옮길 수 없다는 절망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에는 자그마한 희망의 불빛이 깃들어 있다. 또한, 하루키의 세계 속에서 언어의 불완전함에 대해서 수없이 많이 들어온 나라는 사람은, 그의 작품에 대한 감정을 언어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은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절망에서 출발하지만, 그 불가해성을 함께 견디는 인간들 사이의 미세한 온기를 포착한다. 결국, 무라카미 하루키는 비관주의자 중에 가장 낭만적인 사람이자, 어둠 속에 살고 있지만 빛에 대한 얇은 희망의 끈을 끝내 놓지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참조 : 엄기호,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이미지 출처 :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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