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하면 가장 먼저 뭐가 떠오르시나요. <라쇼몽> 같은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가 했던 유명한 말, "좋은 시나리오를 가진 나쁜 영화는 있을 수 있지만 나쁜 시나리오를 가진 좋은 영화는 있을 수 없다"라는 격언으로 구로사와 아키라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죠.
저한테 구로사와 아키라하면 생각나는 키워드는 총 3개입니다. 첫 번째는 완벽주의입니다. 본인의 작품 퀄리티를 지키는 데 타협이 없었던 걸로 유명하죠. 특히 여러 가지 장비를 준비해야 한다거나, 특정한 장소에서 장면을 촬영해야 하는 시대극을 찍을 때 제작자들과의 마찰을 많이 빚었는데요. 예로 대표작 <7인의 사무라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게요.
<7인의 사무라이>를 찍을 때, 주어진 제작비를 다 썼는데 전체의 1/3밖에 찍지 못해서 제작사는 촬영 중단을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하죠. 그 이후로 어찌어찌 추가 예산이 투입되어 촬영이 이어지긴 했는데, 촬영 지연이 너무 많이 일어났던 터라 원래 6월 즈음에 찍었어야 할 장면을 2월에 찍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래서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호우가 내리는 와중에 펼쳐지는 결전 장면을 한겨울인 2월에 촬영했다고 해요. 하필 이때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세트에는 30㎝의 눈이 쌓였는데, 촬영을 해야 하니 스태프들이 소방단과 학생 아르바이트를 동원해 3일에 걸쳐 호스로 물을 뿌려 눈을 녹이는 촌극이 벌어졌다고 하죠.
이렇듯 제작사와 구로사와 아키라 간의 마찰은 구로사와 아키라가 대규모 시대극을 찍을 때마다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카게무샤>라는 작품을 찍을 때도, <란>이라는 작품을 찍을 때도 - 둘 다 아주 훌륭한 작품인데 OTT가 없어서 아쉬운 - 완전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려 한다거나, 갑옷이나 무기와 같은 장비에 대해 아주 깐깐하게 따진다거나 해서 제작사들의 골머리를 썩게 만들었죠. 이 때는 이미 일본 내에서 찍힐 대로 찍힌 상황이라, 일본 자본이 아닌 해외 자본을 끌어와서야 겨우 촬영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 사람의 업적에 비해 일본 내에서 썩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는데, 이런 그의 횡포 때문에 일본 영화계 내에서 그의 악명이 높아진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네요.
구로사와 아키라 하면 생각나는 두 번째 키워드는 바로 혁신입니다. 영상연에서 직전에 에센셜 시네마라고 해서 누벨바그 작품들을 상영했죠. 누벨바그는 프랑스어로 New wave, 새로운 물결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영화계에 새로운 물결을 들여온 건 구로사와 아키라도 만만치 않아요. 앞서 말씀드린 <7인의 사무라이>의 경우에는 팀을 짜서 특정한 목적을 이루는 팀업 무비의 시초가 되었으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요. 또 다른 그의 대표작, <라쇼몽>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보자면. <라쇼몽>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하나의 사건을 여러 명의 시점으로 봤을 때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다중 시점의 기법을 영화계에서 처음 도입시킨 작품입니다. 몇 년 전에 리들리 스콧이 <라스트 듀얼 : 최후의 전투>라는 작품을 낸 적이 있어요. 맷 데이먼이랑 아담드라이버가 나오는, 상당히 재밌는 중세 영화인데, 이것도 한 사건과 관계에 대해서 세 명의 다른 시점을 통해 서술된다는 점에서 보면 라쇼몽이랑 완전 구조가 똑같은 작품이죠. 그 외에 <요짐보>와 같은 작품의 캐릭터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으로 대변되는 서부극의 연출과 주인공 캐릭터에 큰 영향을 주었고, <숨은 요새의 세 악인>과 같은 영화는 스타워즈의 제작에 모티브가 되었죠. 실제로 제작자인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의 모티브를 이 작품에서 얻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이번에 튼 작품, <이키루>는 어떤 측면에서 혁신을 시도했을까요. 이키루가 출시된 년도는 1952년도입니다. 현대영화와 근대 영화를 나누는 기준이 1960년에 나온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라고 본다면, 이키루가 등장한 것은 그보다도 10년 정도 더 전입니다. 아직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 영화의 기준이 전부 제시되지 않은 때라고 볼 수 있죠. 주인공이 끝까지 생존하여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고, 권선징악을 모티브로 하는 작품들이 메인이던 그 시기에, 이키루는 정반대의 서사 진행을 보여줍니다. 주인공은 러닝타임이 절반 정도 흘렀을 때 죽어버리고, 주인공의 주변인들이 장례식에 몰려들어 그에 대해 품평을 하는 식으로 극이 전개되죠. 심지어 장례식이라는 엄숙한 자리임에도 이를 잊은 듯이 무례한 언사를 하는 사람들도 많죠. 이런 방식은 현대 영화에서도 희귀하죠. 아예 주인공이 죽으면서 시작하고 과거를 돌아보는 식으로 전개된다거나, 주요 인물이 죽고 나서 주인공이 교체된다거나 하는 작품은 있어도, <이키루>와 같이 반은 살고 반은 죽어있는 채로 진행되는 작품은 잘 없으니까요.
구로사와 아키라 하면 떠오르는 마지막 키워드, 저는 '절망과 한탄의 분위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전부 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작품들에서는 유달리 비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들이 많습니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모티브로 제작된 작품들 - 리어왕을 모티브로 만든 <란>, 맥베스를 모티브로 만든 <거미의 성>, 햄릿을 모티브로 만든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와 같은 작품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천국과 지옥>, <라쇼몽>, <이키루>와 같은 작품들도 절망의 이미지가 작품 곳곳에 퍼져있죠. 한데 특이한 것은, 후 기작들이 아니라 초기작들인 <라쇼몽>, <이키루>에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촛불과 같이, 절망으로 드리워진 이미지 속 작은 희망의 이미지가 발견된다는 점입니다. 보통 감독들은 나이가 들고 가정이 생기면 작품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경향이 있지요. 일례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도 어두운 영화들을 많이 만들다 가정을 꾸리고 난 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같은 희망적인 엔딩을 보여주는 영화를 만든다 것을 들 수 있겠고요. 또, 홍상수 감독이 최근작으로 갈수록 서릿발 같았던 그 분위기가 점점 잦아들고 희망적인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담고자 하는 것들도 좋은 예시가 될 수 있겠죠. 그런데, 구로사와의 경우에는 이런 케이스들과 완전 정반대라고 볼 수 있죠.
인간이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서슴지 않고 사실을 왜곡한다-라고 내내 인간불신에 대해 이야기하던 <라쇼몽>은 결말부에 인간 신뢰에 대한 가능성을 남기고 마무리됩니다. 그렇다면 <이키루>에서는 어떤가요.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허무의 이미지입니다. 이제 시한부가 되었으니 어떤 일을 해도 의미가 없다는 허무, 그리고 주인공이 열심히 일을 해서 성과를 내고 죽었음에도 그 성과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비웃는 듯한 사람들. 그렇지만 그 허무 속에는 분명히 희망적인 메시지도 숨어있습니다.
일단 삶이 결국 끝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부조리는 분명히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유한된 상황에서 생겨나는 이상한 희망의 이미지가 있달까요?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듯이, 그리고 우리가 듀 이펙트라고 해서 마감시간이 다가올 때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듯, 인간은 시간의 유한성을 마주했을 때 에너지를 얻게 되는 이상한 특성이 있지요. 완전 바닥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을 때, 그 바닥을 박차고 다시 올라갈 수 있다는 낙관을 품게 되는 것처럼요.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오히려 자신 내부에 존재했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그런 초인적인 힘을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게 이 영화의 첫 번째 희망적인 메시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요.
두 번째 메시지는 이 그네를 타고 있는 주인공의 이미지와 관련이 있는데요. 그네라는 건 영화에서 삶의 순환성을 나타낼 때 자주 사용되는 물건이죠. 앞으로 나가도, 뒤로 나가도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언젠가 그 그네는 정지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삶에 언젠가 끝이 오는 것처럼요. 그렇게 계속 반복되고, 언젠가는 멈춰 설 수밖에 없는 부조리 속에서, 웃을 수 있는 자만이 정말로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포스터에도 나오는 그 이미지를 보면 저는 많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세 번째,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는 주인공의 장례식 이후의 모습입니다. 장례식이 끝날 즈음, 사람들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사람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고, 그 사람의 의지를 이어받아 변화를 일으키겠다고. 하지만 그다음 날 시청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사이토라는 부하 직원 한 명이 화를 내지만 주변의 싸늘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습니다. 시청에서 나온 사이토가 아이들이 뛰어노는 놀이터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장면을 끝으로 영화가 마무리 됩니다.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세상에 사이토가 절망하면서 끝이 났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저는 활동적인 아이들 - 파릇파릇한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그 이미지를 보면서 그가 다시 변화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는 쪽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결국 주인공의 죽음은 세상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죽기 전에 했던 다짐은 스스로를 변화시켰고, 그 행동은 누군가를 감화시켜 변화를 촉구했죠. 당장의 세상은 변화시킬 수 없지만, 개인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게 구로사와 아키라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변화된 개인이 또 다른 사람들을 하나둘씩 변화시키다 보면, 이 세상이 조금씩이지만 살기 좋은 형태로 변화하지 않을까요?
너무나 낙관적이고 비현실적인 생각이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그런 희망을 품고 싶어집니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죽은 게 1998년입니다. 1998년은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태어난 해입니다. 굳이 운명적으로 해석하자면, 그의 죽음으로부터 제가 의지를 이어받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죠. 그가 죽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지만, 세상은 그리 많이 변화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와 같이 그의 의지를 이어받은 사람들이 조금씩 노력한다면, 그렇게 한 명 한 명이 변화해 나간다면, 세상도 조금씩 변화하지 않을까 하는 게 제가 하고 싶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