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시작하는 이야기 8
1995년도,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던 노래가 있었어요.
그때 저는 총각이었고, 노래에 매료되어 CD 한 장을 구매했었어요.
제 차량에는 휴대용 CD 플레이어를 장착해 음악을 듣던 시절이었는데,
The Bank 1집에 수록된 「가질 수 없는 너」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어요.
그 노래가 듣고 싶어 구매한 CD에는 이상한 곡이 한 곡 실려 있었어요.
기타를 치며 부르는 연습곡이었는데, 처음엔 신경도 쓰지 않았어요.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CD를 처음부터 재생하게 되었고
녹음실에서 대기하며 나누는 대화와 함께 흘러나오는 그 연습곡이
가사와 멜로디 모두 너무 좋아 단번에 빠져들게 되었어요.
저에게는 「가질 수 없는 너」 보다 더 애절하고,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노래였었어요.
그날 이후로 계속 그 곡을 들었고,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좋아하는 노래가 담긴 저만의 인기가요 테이프를 만들었어요.
그 시절 제가 복무하던 부대에서는
시에서 운영하는 아동복지시설과 노인복지시설에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나갔어요.
월 1회 청소를 지원하고, 명절에는 위문품을 전달하는 식이었어요.
저도 몇 번 함께 나간 적이 있었어요.
그러던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아동복지시설에서 부대에 초청장을 보내왔어요.
자신들만의 크리스마스 행사를 하는데,
4~5명 정도만 와달라는 요청이었어요.
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는 대부분 가족이나 연인과 보내고 싶어 하는 날이라
지원자가 없었어요.
저는 연인도 없었고,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해서 참석하겠다고 지원하게 되었죠.
하지만, 청소 시간 외에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본 적이 없어
조금 걱정되기도 했어요.
아이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도착하자 시설 담당자분이 주의사항을 알려주었어요.
“애들을 너무 불쌍하게 보거나 측은하게 보지 말아 주세요.
그냥 아는 동생들처럼 대해주세요.
그리고 연락처는 절대 주고받지 마세요.”
처음엔 의아했지만 곧 이유를 듣고 이해하게 되었어요.
“기대감을 갖게 했다가 나중에 연락이 끊기면
오히려 큰 상처가 되더라고요.
오늘은 그냥 즐겁게 놀다 가세요.”
그렇게 행사에 참석하여 준비된 음식을 먹고
아이들이 준비한 노래와 춤을 즐겁게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회자가 우리 쪽을 지목하며 장기자랑을 요청했어요.
예상에 없던 상황이라 당황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고,
아이들은 계속 우리에게 나와 달라고 목청을 높였어요.
후배들은 더더욱 움직일 생각이 없었고, 결국
저는 분위기에 떠밀리듯 무대에 오르게 되었어요.
그때, 옆에서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니, 저 오빠 말고 옆에 잘생긴 오빠 시키라니까…”
순간 얼굴이 붉어질 만큼 창피했지만 못 들은 척하고 노래를 시작했어요.
노래방 기계도 없던 시절이라
무반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도입부가 잔잔하게 흐르자 장내가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했어요.
조금씩 제가 부르는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던 거죠.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며 노래를 이어갔고,
클라이맥스를 넘어서 노래가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와 함성, 그리고 앙코르 요청까지 쏟아졌어요.
준비한 곡이 없다며 정중히 사양하고 자리로 돌아가자
아이들은 놀란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어요.
특히 여학생들의 시선이 느껴져
당시 어린 20대 초반의 저는, 얼굴이 다시 붉어졌던 기억이 있어요.
그날 불렀던 노래는 지금도 제 플레이리스트에 있어요.
The Bank 2집에 정식 수록되긴 했지만,
연습곡에서 느껴졌던 담백한 감흥은 다시 느껴지지 않았던 노래예요.
노래방에도 없는 곡이라
반주에 맞춰 불러본 적도 없었어요.
그럼에도 이후 힘들어하는 병사와 식사하며
그 노래를 조용히 불러준 적이 있었고,
그 병사는 큰 위로가 되었다며 고마워했어요.
그 노래는 The Bank 1집 CD에만 수록되었던
「STUDIO 현장녹음 - 10048282」였어요.
예전에 삐삐로 연인에게 보내던 숫자,
“천사에게 빨리 전화해달라”라는 의미를 지녔던 숫자였어요.
내겐 힘겨운 지난겨울이었어.
봄은 정말 멀게만 느껴지고
그럴 때마다 점점 심한 외로움 난 지쳐있었어.
원래 천사는 변장을 잘하거든
나는 정말 처음엔 몰랐었던 걸
지친 나에게 주던 너의 미소가 그저 고마웠을 뿐
거짓말처럼 봄은 다시 오고
난 점점 겨울이던 땔 잊어갔어
사실 어느 순간부터
너에 대한 나의 사랑도 퇴색해 갔어
웃음으로 대신했던 너의 마지막 인사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던 거야
네가 떠난 후에서야 너의 소중함 알았어
오늘도 난 너에게 또 신호를 보내지
나의 천사에게
(노래는 1분 45초 이후부터 나옵니다)
이별의 아픔을 담고 있는 곡이지만
제게는 좋은 멜로디와 그 시절의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생각해 보면 당시 지금의 아내와
약간의 권태기가 찾아와 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마음 깊게 다가왔던 노래였는지도 모르겠네요.
음악은 그 시절의 마음과 시간을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필름이다.
[커버 이미지 출처] Carat 생성 (나노 바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