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로 시작하는 이야기 12
90년대 초반, 이상한 댄스그룹이 신인가수 테스트 무대에 섰다.
그들은 이전까지 본 적 없었던 랩과 노래, 그리고 춤을 함께 선보였다.
남자 세 명으로 구성된 이 댄스그룹은 심사위원들에게 혹평을 받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상당히 기대된다”는 평을 남겼다.
그 사람은 당시 최고 인기스타였던 전영록 씨였다.
어쩌면 시대의 흐름과 세대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TV에서 본 그 짧은 순간의 기억이 잊히기도 전에 그들은 신드롬을 일으키며 최고가 되었다.
어느 휴일, 영내 생활로 답답해하던 나와 후배를 데리고 선배가 렌터카를 빌려 강릉으로 놀러 가자고 했다.
운전은 후배만 할 줄 아는 상황이었고, 나는 그저 돈만 내면 되는 편한 여정이었다.
차종은 스쿠프였는지, 엘란트라였는지 기억은 흐릿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강릉을 향해 달렸다.
화창한 일요일이었고, 우리는 고속도로 대신 국도를 택해 경치를 즐기며 답답한 마음을 풀어냈다.
한 산골 마을에 이르렀을 때, 무밭을 갈아엎는 장면을 보았다.
왠지 모르게 아까운 마음에 차에서 내려 남은 무 몇 개를 뽑아 목을 축이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이동을 하면서, 가지고 간 최신가요 테이프를 틀었는데, 마침 신인무대에 나왔던 그룹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였다.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난 정말 그대 그대만을 좋아했어...
나에겐 오직 그대만이 전부였잖아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
나를 정말 떠나가나요...
사랑을 하고 싶어 너의 모든 향기
내 몸속에 젖어있는 너의 많은 숨결
그 미소 그 눈물 그 알 수 없는 마음...
셋은 달리는 차 안에서 미친 듯이 따라 부르고, 율동까지 흉내 내며 크게 웃었다.
그렇게 달리다 강릉에 도착했고, 처음 가본 경포대 해변가를 거닐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해변가를 걷고 있는 데, 남자들이 모여 앉아서 한 곳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무얼 보나 하고 시선을 따라가 보니, 3명의 여성이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려는데, 그중 하얀색 수영복을 입은 사람이 물밖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는데,.
"헉"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드래곤 불" 만화에서 코피를 품는 장면을 실제로 느낀 것이다.
수영복이 얇아서 인지, 상체가 훤히 비치는 것이었다.
그 여성은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지 그냥 그렇게 서 있었는데, 뭔가 이상한 낌새를 차린 친구가 보더니 얼른 옷으로 몸을 가려주면서 데리고 갔다.
우리는 그렇게 기분이 좋았지만, 짧았던 순간의 아쉬움은 남아있었다.
날씨가 점점 흐려지더니, 비가 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 마음에 걸렸다.
당시에는 삐삐마저 없던 시절이라 부대에서 오는 연락을 받을 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 날씨에 무슨 일 없을 거라 스스로를 달래며 여기저기 구경을 계속했다.
늦은 오후, 점심 겸 저녁을 해결하려 들어간 식당에서 ‘삼순이 매운탕’이라는 처음 듣는 메뉴를 보았다.
식당 주인에게 묻자, 삼순이는 물고기 이름이라고 했다.
지금이 제철이라며 맛있다고 하길래 시켜서 먹어보니 의외로 훌륭했다.
술도 한잔하고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근처 노래방으로 향했다.
녹음이 된다는 말에 더 신이 나, 셋이 번갈아 마이크를 잡으며 노래를 불렀다.
물론 그곳에서도 ‘난 알아요’를 열창하며 춤까지 따라 했다.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노래방을 나서며 우리는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손에 쥐었다.
렌터카를 반납해야 하는 시간이 가까워져 돌아오는 길은 조금 초조했지만, 우리만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를 들으며 기분은 여전히 들떠 있었다.
그러나 부대로 복귀하자 근무자였던 선배에게 불려 갔다.
“낮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지금까지 뭐 했냐?”며 따져 물었고, 강릉으로 갔다 왔다는 말은 못 한 우리는 엉뚱하게도 “영화 보다가 잠들었다”라고 둘러댔다.
당연히 믿어줄 리 없었고, 결국 많이 혼났다.
그날은 즐거운 여행이었지만, 결말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내가 부른 노래가 처음으로 녹음된 카세트테이프였다.
우리는 그 테이프에 이름을 붙였다.
‘삼순이의 추억’.
그리고 지금도 ‘난 알아요’를 들으면 그 시절의 순수한 기분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군 생활 중 가장 짜릿했던 작은 일탈을 함께하며 노래를 불렀던 그 순간이, 지금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깊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그때 참 단순했고, 어리숙했고, 그래서 더 행복했던 것 같다.
잘 꾸며지지 않은 청춘의 하루였지만, 지금까지도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되었다.
삶의 많은 순간이 그렇게 지나간다.
사소한 장면 하나가, 노래 한 곡이, 평범한 하루가...
세월이 흐른 뒤엔 가장 크게 마음을 울리는 추억으로 남는다.
가장 평범했던 순간이 시간이 흐르면 가장 빛나는 추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