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래떡은 우리다

by 홍주빛

요즘 손모를 심는 일을 어디에서 흔히 볼 수 있을까. 그러나 ○○농업고등기술학교의 봄은 다르다. 전교생과 선생님들이 함께 논으로 나아가 손모를 심는 순간, 교정은 밝은 빛으로 가득 찬다.


2, 3학년 언니들은 몇 번의 경험이 있어 노련하고, 처음 무논에 들어서는 1학년 새내기들은 긴장과 설렘이 뒤섞여 어설프기 그지없다. 선생님들도 물장화를 신고, 넓은 챙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학생들과 한마음이 되어 논으로 향한다. 그 앞에는 농악대가 선두에 서고, 북이 둥둥 울리면 꽹과리와 소고가 뒤를 따라 행렬이 이어진다. 본관에서 논까지의 거리는 길지 않지만 그 풍경은 정겹고 따뜻하다.


논에 도착하면 조를 나누어 모줄을 잡는 사람부터, 포토에서 모를 나르는 친구들까지 각자의 자리를 찾는다. 물 위에 찰랑이는 모줄 앞에 서툰 새내기들은 선배와 선생님 사이사이에 끼어 모를 바닥에 꽂아 본다. 어설프면 어떠하랴. 한 줄 심고 뒷걸음질하다 흙이 옷소매에 튀고, 서로의 옷에 묻고, 어느 순간 얼굴엔 머드팩이라도 바른 듯 흙 얼룩이 퍼진다.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이 논바닥에 가득 번져 나간다.


한참 지나면 새참으로 시원한 수박이 배달된다. 모둠별로 둘러앉아 수박을 나눠 먹다 보면, 수박을 먹는 건지 추억을 먹는 건지 모를 만큼 달콤함이 마음 깊숙이 차오른다. 그렇게 모내기는 끝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에 뿌리를 내린 어린 모 사이로 우렁이가 뿌려진다. 제초를 대신해 주는 고마운 일꾼들이다. 몇 해 전엔 꽥꽥거리며 오리들도 논에 들어와 열심히 일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사용하던 오리집은 아직도 논둑 어디엔가 남아 있는 듯하다.


모가 자라는 만큼 여름도 깊어진다. 논둑의 풀들도 무성하게 자란다. 새내기들이 학교에 적응하고 마음이 자라나는 속도와 다르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졸업생 언니가 군 입대를 앞두고 학교를 찾았다. 그런데 이 언니가 논둑 풀을 깎고 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학교 사랑이 지극한 건지, 벼 사랑이 지극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둘 중 하나쯤이겠지 싶었다. 잠시 뒤 학교까지 윙 하는 기계 소리가 들려오더니, 벌써 보안경을 쓰고 앞치마를 걸친 채 장화를 신고 논둑 풀을 베고 있었다. 여름의 논가는 젊음과 뜨거움이 뒤섞여 땀방울처럼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올해 여름은 달랐다. 늦가을까지 이어진 장맛비에 멀쩡하던 벼들이 마치 따귀라도 얻어맞은 듯 비스듬히 쓰러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물이 잠기는 바람에 수확량이 줄었지만, 모두가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11월 11일. 빼빼로데이이자 가래떡데이, 그리고 농민의 날. 의미는 모두 다르지만 '1'이 나란히 선 모양을 기념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학교에서는 한 해 농사를 무사히 마치고 거둬들인 벼를 학생들이 직접 도정했다. 기름지고 뽀얀 햅쌀로 농민의 날을 기념할 가래떡을 만들었다. 봄부터 흘린 땀방울이 결국 길고 단단한 가래떡이라는 결정체로 태어난 것이다. 반마다 떡을 돌리고 선생님들도 함께 나누며 풍년을 주신 창조주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을을 마무리하고 겨울을 맞을 준비를 했다.


따끈한 가래떡을 받아 들고 시상이 떠올라 이렇게 한 편의 시를 짓게 되었다.


가래떡은 우리다

홍주빛


둥둥, 북이 울리고

그 뒤를 꽹과리가 따른다.

풍년을 빌며 울려 퍼지는 장단에

농악대는 앞장선다.


새내기들의 뒷걸음에는

첨벙이는 물결이 묻어 있고,

노련한 언니들은

논둑에 바짝 붙어

모줄을 잡으며 여유를 띤다.


포토에서 한 줌씩 꺼낸 모를

물 위로, 바닥으로 찔러 넣으면

손끝이 간질간질 살아난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초록빛 파도가 한 줄로 밀려온다.


걷어 올린 소매 위에도,

미소 짓는 얼굴에도

머드팩 같은 흙 얼룩이

환하게 웃고 있다.


아득하던 논 끝은

어느새 바람결에 흔들리는

초록 물결로 가득 찼다.


달고 시원한 수박이

새참의 그늘 아래 놓이면,

모내기에도 잠시 쉼표가 찍힌다.


찜통 같은 여름,

논둑을 채우던 풀들을

다부진 기계 소리가 낙엽처럼 쓰러뜨린다.


야속히 퍼붓던 장맛비는

고개 숙인 벼이삭의 뺨을 때렸지만,

그렇다 해서 꺾일 리 없다.


더 단단한 알곡으로 여물어

마침내 길고 긴 흰 가래떡으로

뜨거운 기적이 되어 태어난다.


가래떡은 우리다.

길게, 길게 이어져

멈추지 않고 나아가라는 뜻.

서로 하나 되어 살아가자는

우리의 뜨거운 약속이다.


#농촌의 봄 #모내기풍경 #학교이야기 #따뜻한 산문 #시가 있는 하루 #한국의 계절 #가래떡은 우리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21화겨울이 오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