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카페는 스페셜티 커피를 판매한다. 스페셜티 커피는 고품질 원두를 사용해서 추출한 커피를 말하는데, 일반적인 커피에 비해 다채로운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출근을 하면 나는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신다. 다양한 종류의 원두 중 하나를 골라 분쇄한 후 드리퍼에 담고 천천히 물줄기를 붓는다. 그렇게 추출된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향미를 느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원두로 내린 커피에서는 자스민의 향긋함과 레몬의 산뜻함, 갈색 설탕의 은은한 단맛이 느껴진다. 정성 들여 내린 커피 한 잔은 그날의 내 기분을 더욱 짙게 만들어 준다.
스페셜티 커피 원두는 각자 고유한 향미와 개성을 지니고 있다. 커피의 향미는 크게 꽃 향, 과일 향, 견과류 향, 초콜릿 향 등으로 나뉘며, 그 안에서도 다양한 향들이 있다. 한 잔의 커피에는 여러 향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커피는 워낙 예민하기도 해서 원두량과 분쇄도, 물 온도 등 요소 하나하나가 맛과 향에 영향을 준다. 모든 조건이 적절히 맞아떨어지면 원두가 가진 향미가 잘 살아나고, 일부 조건이 맞지 않으면 향미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기도 한다.
사람에게도 각자 고유의 향미가 있다면, 과거의 나는 내 향미가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갈지 않은 원두에 찬물을 부어서 내린 커피 같은 느낌이랄까.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특별한 취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 축구를 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던 때가 있었지만, 첫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 그마저 놓아버렸다. 내 취향을 알지 못하니 연애나 결혼을 할 때에도 상대가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연애를 시작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데이트는 점점 뻔해지고 함께하는 시간은 무료해졌다. 시시콜콜한 잡담이나 농담이 대화의 대부분을 이뤘다. 가장 가까운 사람과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갈망이 있었지만, 결국 그 갈망을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면 대화는 자연히 깊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여러 가지 노력도 해 보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대화의 결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노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내 취향과 생각이 풍부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대화에 대한 내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혼 후 혼자가 되고 나서야 나의 취향 찾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처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 속에 나는 나를 만들어갔다. 오래전 좋아했던 것들, 한 번쯤 관심 있던 것들, 새로이 관심이 생기는 것들을 모두 시도했다. 좋아했던 축구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좋아했던 가수의 공연을 찾아다니고, 전시를 보고, 피아노를 치고, 복싱을 배웠다. 정적이고 차분한 줄만 알았던 나는 생각보다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축구장에서 응원을 하며, 복싱을 하며 에너지를 발산할 때 나는 자유를 느꼈다. 나는 지극히 이성적이기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생각보다 감성적인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클래식 공연을 보며 벅찬 감동을 느꼈고, 고흐와 뭉크의 작품 속 깊은 우울과 고독을 느꼈다.
또한 나는 책을 읽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글쓰기의 기초부터 배우기 위해 에세이 강좌를 신청했다. 그곳에서 글을 쓰며 글쓰기에 점점 빠져들었고, 글동무들도 만났다. 강의가 끝난 후 계속 글을 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글을 나누고 의견을 나누었다. 나이도, 삶의 모양도 모두 달랐지만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했다. 평소 말수가 많지 않았던 나도 그 모임에만 가면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가득 차올랐다. 우리에게는 글쓰기와 책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있었고, 글에 꾹꾹 눌러 담은 각자의 생각이 있었다. 그랬기에 이야깃거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샘솟았다.
제주에 내려오면서 글쓰기 모임에는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온라인으로나마 글은 계속 나누었지만, 그들과의 대화가 아쉽고 그리워졌다. 그 무렵 카페 동료들을 만났다. 그들은 카페의 차분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그대로 닮은 사람들이다. 아무리 바빠도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으며 서로를 배려하고 돕는다. 바쁜 와중에도 소소한 대화를 자주 하는데, 일상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들 중에는 제주 토박이도 있지만 대부분 나처럼 육지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제주에서 살아가는 각자의 방식을 나누고, 그 안에서의 생각들을 나누다 보면 대화는 끊이지 않고 자연스레 이어진다. 덕분에 나는 다시 수다쟁이가 되었다.
커피처럼 사람도 고유의 향미가 있다. 누군가는 그가 가진 향미를 제대로 추출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향미가 무엇인지 모른 채로 살아간다. 그 차이는 아마도 다양한 경험과 생각에서 비롯될 것이다.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고 그 취향에 자신의 철학을 덧입힌다면 누구나 풍부하고 다채로운 향미를 지닌 스페셜티 커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나는 나의 취향과 내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가며 고유의 향미를 발견하고 있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는 그 향미를 더욱 짙게 만들어 준다. 지금처럼 새로운 경험을 쌓고 나만의 생각을 다지는 이 시간이 언젠가 나를 확고한 개성을 지닌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그때가 되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처럼 자스민의 향긋함과 레몬의 산뜻함, 갈색 설탕의 은은한 단맛을 풍기는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