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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 스마일 가면을 벗어던지는 날이 오면

by 은도

나는 잘 웃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걸 장점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 습관이 좋지만은 않다. 미소 뒤엔 표정과 상반된 많은 감정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색하거나 두렵거나, 슬프거나 우울하거나 아픈 감정들. 많은 경우에 미소는 그 감정들을 숨기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 나는 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게 그토록 어려울까. 아마도 그 시작은 아주 어릴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우리 집 가정 형편은 늘 어려웠다. 성장하는 동안 곰팡이 냄새가 나는 눅눅한 지하 셋방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노력 덕분에 꽤 화목한 가정이었지만 동시에 부모님 간의 불화가 끊이지 않는 가정이었다.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을 느끼면서도 불안했던 환경 속에서 자란 나는 늘 착한 딸, 든든한 맏딸이 되고 싶었다. 원하는 것, 힘든 일, 아픈 감정은 숨기고 필요 없는 척, 아무 일 없는 척, 괜찮은 척 하며 성장기를 보냈다. 그렇게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이 쌓이다 엉뚱한 때, 엉뚱한 방향으로 터져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으니, 착한 딸이 되는 것은 반은 실패인 것 같지만 말이다.


그게 습관이 되었을까. 나는 집 밖에서도 내 상황이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에게조차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나서야 ‘이런 일이 있었고, 지금은 괜찮다’는 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내 최선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내게 ‘힘들 때 말하지 않고, 다 지나고 나서야 말하는 게 서운하다’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2년 전,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을 겪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기에 친구들을 만나면 내게 일어난 일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그러고는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오히려 잘 된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행여 상대가 내 마음에 공감하는 반응을 보이거나 위로를 건넬까 봐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다. 공감을 받으면 내 마음이 들키는 것 같아 무서웠고, 위로를 받으면 내 감정이 드러날까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친구 한 명을 만났다. 그날도 나는 미소를 띄며 내 소식을 전했다. 친구와 헤어진 후 집에 돌아왔을 때, 그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네가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하기까지 혼자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울컥했어. 요즘 어떤 나날을 보내는지 잘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우울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너를 지지하는 친구가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친구와 만나는 내내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는데,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 부끄러운 마음 사이로 온기가 틈입하는 것을 느꼈다. 마음에 온기가 사르르 번져가는 느낌은 낯설었지만 포근했다. 그날, 혼자 방에 들어가 한참을 울었다.


그 후로도 나는 뜻밖의 위로를 많이 받았다. 어떤 이는 책의 구절을 빌려, 어떤 이는 자신의 아팠던 이야기를 해 주는 것으로 위로를 건넸다.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말하지 않아도 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메시지를,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혼자서는 아무리 애써도 달랠 수 없던 감정들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도 타인의 위로와 온기가 필요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타인과 감정을 나누고 마음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삶일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들의 도움으로 가면이 아니라 진짜 웃음을 되찾을 무렵, 친구로부터 한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작고 기특한 불행>이라는 그 책에는 작가가 친구와 서로의 불행을 나누었던 경험담이 나온다. 그 경험담을 풀어놓으며 작가가 건넨 한 문장이 내 마음에 훅 들어왔다.


‘우리는 서로의 불행을 나눠 먹으며 위로받고 서로를 더 껴안아 주게 되니 오히려 좋다.’


그 문장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내 불행도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나아가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위로와 온기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그 마음을 담아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혼자 쓰고 읽던 글을 소수의 사람들과 나누기 시작했고,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일에는 여전히 서투르다. 얼마 전, 제주에 와서 새로 알게 된 친구가 내게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꺼냈다. 괜찮을 수 없는 일을 이야기하며 괜찮다고 말하는 그 친구가, 그의 웃는 얼굴이 꼭 내 모습 같았다. 내 과거에 대해 모르는 친구였기에, 내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입을 꾹 닫고 열지 못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내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마음을 전하지도 못했다.



타인에게 위로를 전하는 사람이 되기에 나는 아직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스마일’ 가면을 벗고 진짜 내 감정과 마음을 드러낼 용기가 부족하니 말이다. 하지만 글을 통해 나를 조금씩 드러내며 타인과 소통하는 경험이 쌓이는 만큼 내 안에 용기가 조금씩 쌓이지 않을까. 용기가 조금씩 쌓여 언젠가 ‘스마일’ 가면을 벗어던지는 날이 오면, 솔직한 내 마음 그대로 가까운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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