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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게이트

티켓은 달라도, 도착시간은 같다

by Susie 방글이





아침 햇빛이 건물 사이로 부서지는 거리에는, 각자의 속도로 걷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커피를 들고 바삐 뛰고, 누군가는 전화기 너머의 한숨을 들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똑같아 보이는 출근길이라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말하지 못한 사연들이 겹겹이 겹쳐 있다.


계산대 너머의 직원도, 핸들을 잡은 기사도, 스팀 소리 속 바리스타도 그 순간만큼은 자신만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을 바라보는 일은 도심 한복판을 지나가는 군중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소설들을 읽어내는 일과도 같다.


그리고 그 수백 개의 사연이 동시에 숨을 쉬는 곳—

그곳이 바로 공항이다.


유리 너머로 설렘이 출발 준비 중이다.


공항은 언제나 특별하다. 출국장 앞에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국장 앞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만남과 이별이 동시에 일어나는 공간, 바로 공항이다.


출국장의 풍경은 늘 설렌다. 전광판에 뜨는 도시 이름만 봐도 마음이 들썩인다. 파리, 뉴욕, 방콕, 인천. “뉴욕이요”라는 말과 함께 짐을 부치는 순간, 이미 여행은 시작된다. 짐은 무겁지만 마음은 날아오른다.


입국장은 또 다른 이야기다. 긴 비행 끝에 돌아온 얼굴엔 안도감이 묻어나고, 가족을 마주하는 순간 환한 미소가 터진다. 남편이 한국에서 돌아오는 날, 딸과 나는 공항으로 달려간다.


유리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면, 매의 눈으로 아빠를 찾아 헤맨다. 한 번은 비슷한 캐리어를 끌던 낯선 아저씨에게 손을 흔들어 딸에게 “렌즈 꼈어?”라는 핀잔을 들었다.

그날 공항은 작은 시트콤 세트장이었다.


반대로 딸을 떠나보내는 날, 공항은 갑자기 낯설고 무겁다. "문자 답장 바로바로 할게!"라는 말은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믿고 싶다. 자동문 너머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나면, 집 안도 괜히 한 톤 어두워진 느낌이다.


하지만 그 빈자리는 단순한 공백이 아니다. 다음 만남을 위한 숨 고르기, 문장 속 쉼표 같은 존재다.


그렇게 공항은 감정의 진폭을 넓힌다.

설렘과 그리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어디론가 가는 길, 사람들은 조용히 제 차례를 기다린다


그런데 공항엔 또 다른 풍경이 있다.

바로 등급의 세계다.


티켓 한 장이 사람을 나누는 순간이 있다.

체크인 카운터부터 이미 세계는 쪼개진다.

우리를 나누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한다.


이코노미는 줄이 줄을 낳는 공간,

비즈니스는 여유의 표정이 흐르는 통로,

일등석은 줄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세상.


보안 검색대에서도 속도는 다르다.

라운지는 더 노골적이다.

문 하나가 특별함을 허락하고, 동시에 바깥세상을 평범하게 만들어버린다.


기내에서는 커튼 하나가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

한쪽은 물컵, 한쪽은 샴페인.

공간이 넓을수록 몸의 긴장은 풀리지만,

공간이 좁아도 마음의 설렘은 동일하다.


재미있는 건 사실,

꼭 돈이 많아야 그 커튼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일리지를 성실하게 모은 덕에

어느 날 문득 새로운 세상에 도달할 수도 있고,

반대로 충분한 여유가 있어도

“착륙해서 쓸 즐거움이 더 좋지”라는 사람도 있다.


결국 선택은 취향과 우선순위의 문제다.

누구는 다리 뻗는 넓이를 택하고,

누구는 도착지에서의 맛있는 식사를 택한다.


공항은 그래서 더 흥미롭다.

설렘이 우선인 사람도 있고,

효율이 우선인 사람도 있고,

대접받고 싶은 날도 있고,

그냥 빨리 잠들고 싶은 날도 있다.


저 구름 너머, 또 다른 이야기와 만난다.


하지만 목적지는 모두 똑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좌석 등급이 인생의 등급을 말해주는 건 아니다.

어떤 자리냐 보다, 누구와 어디로 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비행기는 결국 모두 이륙하고, 우리는 각자의 속도대로 날아간다.


삶도 커다란 공항 같다.

지연되고, 변경되고, 때로는 취소도 된다.

줄이 끝없이 길어지는 날도 있고,

아무리 찾아도 라운지가 보이지 않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구름은 모두의 머리 위를 똑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그러니 오늘도 마음속 보딩패스를 꺼내 들자.

다음 목적지가 어디든, 그 설레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다.


공항이든, 거리든, 어디에서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티켓을 손에 쥐고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속도로 살아간다.


미소 뒤에는 말하지 않은 사정이 있고, 슬픔 뒤에는 다시 걸어갈 용기가 숨어 있다.

손에 쥔 티켓 한 장에도 보이지 않는 사연의 무게가 실려 있다.


결국 우리는 모두 각자의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오가며 주어진 삶의 게이트를 통과해 가는 사람들이다.


수많은 발걸음 속에 숨은 수많은 이야기.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게이트를 향한다


문이 열리고, 또 다른 하루가 내 앞에 펼쳐진다. 길게 기다린 순간 끝,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숨 돌리고 나면, 삶도 또 새 출발을 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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