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남고, 다시 나타나는 것들
사람과 양말은 닮았다.
처음엔 꼭 맞고 따뜻하지만, 세탁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늘어나기도 하고, 짝을 잃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사람을 좋아한다.
동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순간들이 내 삶의 일부를 채웠다.
우리 집은 자연스레 '아지트'가 되었고,
12년 넘게 한 회사 인사과에서 일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중에는 여전히 마음 한편에 남은 이들도 있다.
그런 삶을 뒤로하고, 나는 회사를 옮겼다.
무언가를 버린다기보다, 또 다른 문장을 써 내려가기 위해 한 챕터를 덮은 느낌이었다.
다만 이전 문장의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로,
나는 새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새로운 회사의 공기는 낯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낯선 자리에서 이름을 다시 불리고, 내 역할을 새로 만들어가는 일은 두렵기도, 신선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자, 지난 직장 사람들과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언제 밥 한번 먹자."
그 흔한 인사는 각자의 일정 속에 묻혀 희미해졌다.
톡창엔 새로운 이름들이 차곡히 쌓여갔고, 그 사이에서 문득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 있었던 시간은 그 공간이 만들어준 온기였을까,
아니면 정말 서로의 마음이 닿았던 걸까.
서운하기보다는 담담했다.
그럼에도 가끔, 이름 하나가 불쑥 떠오르면 마음이 잠깐 흔들렸다.
모든 관계에는 흐름이 있고, 어떤 인연은 계절처럼 잠시 머물다 간다.
그저 이제는 떠난 이들의 빈자리에 새로운 리듬이 생겨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오후였다.
건조가 끝난 세탁물들을 하나씩 개고 있었는데, 양말 한 짝이 보이지 않았다.
티셔츠, 수건, 손수건, 그리고 양말 하나.
아무리 뒤적여봐도 짝은 없었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가끔 이런 일이 있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다 돌리고 나면 한 짝이 사라진다.
함께 돌던 것들이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흩어지는 것처럼.
나는 양말을 찾아 헤매지는 않았지만, 신경이 쓰였다.
눈은 자꾸 세탁기 안쪽을 훑었다.
혹시 얼굴을 내밀까 싶어서.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는 걸.
한때는 같은 리듬으로 함께 돌다가, 어느 날 문득 각자의 길로 흩어지는 것.
그 끝에는 특별한 이유도, 명확한 결말도 없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날은 달랐다.
사라진 짝보다 손에 남은 이 한 짝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조용히 남은 것의 온기 — 사람은 이상하게도, 남은 것보다 사라진 것에 더 마음을 쏟는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손실 회피라 부른다지만,
나는 그것이 꼭 이성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음은 늘, 떠난 자리의 온도를 더 오래 기억하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닫는다.
정작 우리를 지탱해 주는 건, 떠난 것이 아니라 남은 것이라는 걸.
짝을 잃은 양말이 새로운 용도를 찾아가듯,
관계도 그렇게 다른 모양으로 남는다.
어떤 인연은 발끝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어떤 인연은 서랍 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때론 세탁기와 건조대 사이, 혹은 세탁실 구석 어딘가에서 사라진 양말 한 짝을 발견하기도 한다.
먼지 쌓인 틈새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그것은,
마치 잊혔던 인연이 불쑥 다시 나타난 기념품처럼 반가웠다.
삶은 종종, 한 짝의 양말처럼 비워둔 자리를 통해 균형을 가르친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세탁실 바닥 위로 길게 누워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관계란 어쩌면 양말 한 짝 같다.
사라졌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한동안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것.
그리고 언젠가 문득,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발견되기도 하는 것.
잃은 것과 남은 것이 번갈아가며 우리의 시간을 만든다.
사라짐과 남음, 물음표와 느낌표가 뒤섞인 자리에서
우리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조금은 더 사람다워진다.
양말 한 짝이 빠진 빨래를 다 개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이런 사소한 불완전함이,
어쩌면 내 삶을 조금 더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나는 오늘도, 남은 것의 온기를 오래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인생은 어쩌면 한 짝의 양말처럼, 잃음과 남음이 맞물려야 비로소 따뜻해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