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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도 놀이터 갈 수 있다

조심: 어른이 놀고 있습니다

by Susie 방글이




브런치북에서 이어가던 몇 가지 연재를 잠시 숨 고르듯 멈춰두었다. 쓰다 보면 어딘가 다른 결이 스치고, '지금은 이 이야기를 먼저 꺼내볼까?'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한동안 미뤄두었던 글감들을 하나씩 꺼내보기로 했다.


그중 첫 번째가 바로—눈치챘겠지만—그 '향나무 책갈피' 사건의 다음 장면이다. 만들다 말고 갑자기 현타가 와서, 잠시 집 안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버리던 그 순간. 이미 '그 말이 그 말' 연재를 읽어온 분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인생이라는 게 그렇지 않던가. 잠시 멈춘 줄 알았던 일들이 뒤에서는 은근히 더 커지고, 결국 우리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데려가곤 한다. 오늘은 그 조용한 확장, 그 뒤를 이어가는 장면을 들려주려 한다.


어느 날 남편이, 마치 산에서 막 캐온 보물처럼 향나무 한 무더기를 들고 들어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 공기가 살짝 바뀌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나무 향, 코끝을 스치는 잔잔한 숲의 냄새, 그리고 왠지 모를 설렘.


나는 직감했다. 아… 또 뭔가 시작되는구나. 나무가 많아지면, 우리 집에는 늘 일이 생긴다. 대부분의 일은 남편이 시작하고, 나는 커피를 들고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는 쪽이다.


남편은 곧바로 작업대 앞에 앉아 향나무를 하나하나 손으로 만지며 책갈피 제작에 돌입했다. 처음엔 평소처럼 지인들에게 나눠주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는 원래 "만들면 나눈다"는 가정 규칙 같은 게 있다. 우리가 만든 것은 오래 머무르지 않고, 친구들의 집으로 술렁술렁 퍼져나갔다. 거의 자연의 법칙처럼.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첫 컷.


현재는 토막, 미래는 작품(아마도).


이제 결 따라 한 번 더— 본격 작업 시작. 나무는 결을 따라가면 되고, 나는 조용히 긴장하면 된다


여기서부터 슬슬 작품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책갈피가 하나둘 완성될 때마다 남편의 작업대 주변 공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집중하는 그의 눈빛,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 나무 조각 위로 사포가 스치며 나는 낮은 소리, 모든 것이 은근하게 긴장을 띄우고 있었다.


나는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 이건 좀 예쁜데? 그냥 지인들에게만 던져주기엔 아깝지 않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책갈피에 시선을 오래 머금고, 감탄의 기운을 슬쩍 뿜어버렸다.


향나무가 많다는 것은 곧 남편의 '추가 재료 구매 모드'가 켜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크고 작은 구슬, 늘어나는 장식들, 온갖 도구들. 알림 창은 한동안 '배송 중'이라는 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향나무는 조용히 향을 뿜어내면서도, 은근히 요구 사항이 많았다.


"우리 좀 꾸며줄래?" 하는 얼굴로, 그냥 지나가게 두지 않는 그런 태도랄까.


장식들은 모여 회의 중이고, 작업 테이블은 분주한데… 빼꼼이는 그 옆에서 아주 평화롭게 낮잠 중.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서랍 깊숙한 곳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자개였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언젠가 쓰겠지"라며 사둔 그것. 그런데 그 '언젠가'가 이렇게 우리의 현실 속으로 등장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남편이 자개 한 조각을 향나무 위에 얹는 순간, 사소한 나무 조각 하나가 갑자기 고급스러운 존재감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빛이 자개에 닿자, 은은한 무지갯빛이 작업대 위로 퍼졌다. 나무 위에서 자개가 조용히 반짝이며 숨 쉬듯 빛을 흘리고, 남편의 손길이 지나가자 책갈피 전체가 한층 품격 있는 작은 예술 작품으로 살아났다. 향나무의 자연스러운 향과 자개의 은은한 반짝임이 어우러지면서, 마치 작은 왕실의 비밀 컬렉션 한 조각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숨을 잠시 죽이고 바라보았다. 이 순간, 이 빛과 향, 손끝의 움직임까지 합쳐져 책갈피 하나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남편 옆에 서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면… 진짜 돈 받고 팔아도 되지 않나? 우스갯소리였는데, 어쩐지 그 순간만큼은 묘하게 진지함이 발동됐다.

그러다 남편은 다시 웃으며 향나무를 다듬기 시작했고, 나는 우리가 방금까지 왜 이리 진지했나 싶어 살짝 웃음이 났다.


책갈피가 완성되기까지는 총 18 단계에 걸친 수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완성된 자개 책갈피들. 닮은 듯하지만 그 어느 것도 똑같지 않다. 모두 반짝이지만 각자 다른 얼굴이다.


나무의 옹이가 있는 자리 위에 자개를 얹었다. 디테일을 들여다보면 이 책갈피의 표정이 은근히 스며 나오는 듯하다.


또다시 나무 조각이 갈리고, 사포 소리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고, 향과 은은한 자개빛이 작업실 안에 천천히 퍼졌다. 나는 바로 옆에서 그 냄새를 들이마시며, 마치 나도 함께 만들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방금 전 스쳤던 그 고민을 완전히 놓지도 못하고 있었다. 작업을 바라보면서도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아… 진짜 판다면, 누가 살까? 얼마에 살까? 30불? 40불이면 누가 살까?'


손끝으로 느껴지는 나무 결, 사포가 스치는 낮은 소리, 은은하게 퍼지는 향, 그리고 반짝이는 자개. 모든 감각이 '작은 예술품'이라는 사실을 속삭이면서, 마치 팔기로 결정한 것처럼 가격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


"이거… 진짜 판다면 가격을 얼마로 해야 할까?"

내 질문에 남편은 책갈피를 손에 들어 올리며 눈을 반짝였다.


"음… 자개가 올라간 건 최소 100불은 받아야지."

나는 거의 웃음이 터질 뻔하며 되물었다.


"100불? 누가 사겠어, 이걸 그 가격에?"

그는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누가 알아. 누군가는 이걸 좋아할지도 모르잖아. 손끝 느낌이나 향까지 같이 마음에 들어 할 사람도 있을 거고."


남편은 이미 김칫국을 반쯤 마신 눈치였다.
'아, 우리 혹시 대박 나면 어떡하지?' 그는 이렇게 늘 김칫국을 잘 마신다.


서로 웃으며, 우리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향나무와 자개가 어우러져 천천히 완성되는 책갈피들은 이제 단순한 나무 조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쌓아온 시간과 손길이 담긴 작은 예술 작품이 되었다.

우리가 이 책갈피들에게 어떤 '첫 집'을 찾아줄 수 있을까 궁금하다.


아직은 모르지만,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생각보다 꽤 재미있는 상태다.

다음 여정을, 조금 더 반짝거릴 다음 장면을 기대하며...


작업실 표지판 – Child at Play- Caution. 주의: 여기엔 실제로 놀고 있는 어른이 있습니다. 작업 중 아님. 그냥 신난 중입니다.


표지판은 장난처럼 붙였지만, 사실은 우리 삶이 딱 그렇다. 바쁘고 복잡한 와중에도 저마다의 '놀이'를 잃지 않는 것.남편은 작업실에서, 나는 글 속에서. 어른이라도, 아니 어른이니까 더 필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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