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러 있지만 여전히 여행 중
오늘의 도착지는 우리 집 거실이다. 집에 머물러 있어도 여행을 좋아하는 마음은 늘 살아 있고, 요즘의 하루를 비행 일정으로 적어본다면 꽤나 그럴듯하다. 비행기 티켓은 없지만 나는 매일 어디론가 출발하고 또 도착한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밤새 이동한 뒤 낯선 도시에서 맞는 새벽 공기처럼 느껴진다. 집 안의 차가운 온도는 공항 게이트를 막 빠져나왔을 때 맡게 되는 묘한 '도착의 냄새'를 떠올리게 하고, 조용한 도착만큼 은근한 환대도 없다.
가끔은 이유 없이 공항이 그리운 날도 있다. 몸은 집에 있는데 마음은 어디론가 도착하고 싶은 날. 그럴 때 나는 괜히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마치 여행자가 길을 잃었을 때 지도를 펼쳐보는 마음처럼. 냉장고 불이 켜지는 순간 평범한 재료들도 잠깐은 면세점 진열대처럼 보이고, 어제 먹다 남은 김치찌개는 먼 도시에서 데려온 기념품처럼 느껴진다.
장보기 리스트 또한 작은 보딩패스 같다. 시금치, 두부, 우유, 그리고 '할인하면 탑승'하는 딸기. 네 줄짜리 종이를 들고 집을 나서면 어딘가로 출국하는 기분이 된다.
커피머신 앞은 나만의 입국심사대다.
"오늘 컨디션은 어떤가요?"
"커피 농도는 어느 나라로 가시겠습니까?"
묻고 답하는 건 모두 나이지만, 때때로 꽤 깐깐한 심사관처럼 굴게 된다.
그 사이 빼꼼이는 이미 입국을 마친 여행자처럼 들떠 있다. 문만 열리면 동네 한 바퀴 산책이 파리 투어가 되고, 체코 골목이 되고, 부산의 해변길이 된다. 이 아이에게 세계는 늘 도로 위에서 새로 열리는 지도로 존재하고, 그 지도의 끝에서 나는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마음이 괜히 흔들리는 순간도 있다. 감정이 흩어지고 바닥이 살짝 가라앉는, 내 하루 속 가장 익숙한 기내 난기류 같은 시간. 그럴 때 나는 스스로에게 기내 방송을 건넨다.
"승객 여러분, 약한 난기류를 지나고 있습니다. 잠시 후 안정권에 진입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천천히 균형을 회복한다. 흔들림이 지나간 자리에 조금은 단단함이 남는다.
난기류가 잦아들면 잠시 '레이오버'를 맞는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지만 슬며시 멈춰 서게 되는 시간. 결정할 것도, 서두를 것도 없는 텅 빈 공항 게이트 같은 순간이다. 그곳에서 나는 잠시 여행객으로 돌아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다음 비행은 조금 늦어도 괜찮다"라고 말한다. 짧은 멈춤이 다음 항로를 만든다. 멈추는 법을 아는 여행자는 어디서든 다시 떠날 수 있으니까.
저녁이 되면 소파에 앉아 오늘의 수하물을 찾는다. 피곤함, 작은 걱정, 살짝 스친 서운함 같은 것들이 캐러셀 위를 천천히 도는 캐리어처럼 돌아온다.
"이건 챙겨가실 건가요, 아니면 두고 가실 건가요?"
스스로에게 묻다 보면 가벼운 것들은 금세 사라지고, 오늘 내려놓아도 되는 것들은 조용히 흘러간다. 짐을 줄이는 일 역시 여행자가 배우는 기술이다.
책장 한편에 방치해 둔 책을 펼치는 순간은 새로운 여행지의 골목을 우연히 발견한 느낌이다. 늘 그 자리에 있던 책이 오늘만은 어느 도시의 조용한 낡은 책방처럼 보이고, 뜻밖의 보물을 만난 사람처럼 마음이 밝아진다.
그럴 때마다 여행의 본질은 멀리 가는 데 있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원래 있던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능력.' 그게 여행의 핵심이라면, 나는 지금도 집에서 충분히 여행 중이다.
대륙은 바뀌지 않았지만 나는 매일 도착하고 떠나고 흔들리고 멈추고 다시 출발한다. 그래서 오늘도 조용히 말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숨 좀 돌리면 다음 여행은 자연스럽게 찾아올 거야."
멀리 가지 않아도 여행은 된다. 집이 여행지고, 거실이 도착지며, 내일은 같은 자리에서 새로운 출발이 열린다. 나는 머물러 있지만 여전히 여행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글이든 여행이든 결국 마음이 먼저 가리키는 '진짜 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걸. 그 방향을 따르다 보면 짧은 걸음도 여행이 되고, 짧은 문장도 여정이 된다. 결국 중요한 건 얼마나 멀리 갔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걸었느냐다. 그래야 여행도, 글도 오래 남는다.
그래서 이 글이 실린 '마음의 여행자'라는 메거진은, 내가 원할 때 아무 때나 마음을 기록하는 곳이다. 어디에 있든, 어떤 시간대이든, 마음만 움직이면 곧바로 이륙할 수 있는 작은 활주로.
목적지가 없어도 괜찮고, 여정이 길지 않아도 괜찮다. 마치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나만의 free pass처럼, 떠오른 마음을 짧게 적어도, 길게 풀어도, 흐르듯 남겨도 된다.
이곳에서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떠나고, 머물고, 도착한다.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마다 열리는 작은 비행로다.
가만히 서 있는 풍경 앞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마음도 이렇게 단단해질 수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