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있었네.
얼마 전 글을 쓰며 발행 전 키워드를 고르다가, 문득 '우정'이라는 단어가 가족 이야기와 어울릴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순간 나는 오래 품어온 질문을 다시 떠올렸다.
"부모님과 친구처럼 지낼 수 없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라기보다, 삶을 지나오며 무의식 깊은 곳에 조용히 가라앉아 있던 감정의 결을 건드리는 문장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한 번쯤은 비슷한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식탁 위 국을 휘젓다가 잠시 스치는 가벼운 생각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마음속 어딘가에 접어 두었다가 꺼내기 어려운 오래된 편지 같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 질문을 오랫동안 간직한 채 살아왔다. 어릴 때부터, 그리고 어른이 되고 나서도, 무엇인지 모르게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선’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막연히 느꼈던 것 같다.
그 선은 사랑, 책임, 보호, 사명감 같은 단어들이 모여 만들어낸 거리였다. 마치 서로를 향해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우면서도 막상 안아보려 하면 팔꿈치가 부딪혀 버리는 묘한 경계 같았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감이 선명한 선이었다. 부모는 지켜야 하고 자식은 기대야 한다는 오래된 규칙 안에서, 한 사람은 늘 조금 더 단단해져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언제나 사랑이 깊을수록 더 신중해지고, 가까울수록 더 많은 말을 삼키게 되는 역설적인 무게를 품고 있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그 무게를 더 키웠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보다 사랑을 담당하는 역할에 더 익숙해진 채 살아왔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내가 엄마가 되면서, 예전에는 벽처럼 느껴졌던 그 선이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단단하고 어두운 벽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마음의 각도에 따라 빛이 스며드는 작은 문틈처럼 보였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만들어진 경계라기보다, 서로에게 조금만 마음을 기울이면 열리는 공간이었고, 때로는 그 안으로 따스한 기류가 스며드는 통로이기도 했다.
우리가 서로를 향해 한 발만 다가가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그 문틈은 생각보다 넓어졌고, 그 안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친구 같은 우정이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애초에 벽이었던 적은 없고, 다만 우리가 너무 오래 벽이라고 믿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틈을 가장 선명하게 체감한 순간은 미국에서 친구의 부모님을 만났을 때였다. 친구는 집에 없었지만, 나는 그분들과 차를 마시며 정치 이야기, 연애 이야기, 그리고 각자의 일상 속 조용한 고민들까지 가볍게 나누었다.
부모님과 비슷한 연령대의 분들과 이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지만, 동시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 경험은, 내가 '가족에게만' 기댄다는 방식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열어주었다.
비슷한 감정은 한국 여행 중에도 찾아왔다. 딸은 미국에 있었고, 우리는 딸의 가장 친한 친구와 그 부모님을 만났다.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웃고 이야기했고, 서로 다른 나라에서 흘러온 삶의 결이 한 테이블에서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순간, 사람 사이의 거리라는 것이 결국 마음의 방향성에 의해 달라진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느꼈다. 그 모든 경험이 내 안의 낡은 선들을 조금씩 부드럽게 지워나갔다.
그제야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가족과 친구 사이의 거리는 혈연이나 나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가까워지고자 하는 의지, 가볍게 웃어줄 여유, 서로를 향한 작은 용기 같은 것들이 그 거리를 결정한다.
우리 부부와 딸은 친구보다 가깝고 가족보다 더 솔직하다. 함께 웃고 장난치고, 때로는 진지한 마음의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는다. 딸이 멀리 있을 때 딸의 친구로부터 오는 짧은 안부 메시지는 잠시 딸의 숨결을 내 곁으로 데려다 놓는 듯한 기분을 주고, 그 작은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를 향한 신뢰와 우정 같은 결을 확인한다.
심리학자들은 친밀감을 '작은 순간들이 오래 쌓여 만들어지는 신뢰'라고 하고, 철학자들은 사랑은 책임에서 시작되고 우정은 선택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족과 우정이 포개지는 지점에 서 보면 그 둘은 어색하게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섞이며 전혀 새로운 온도를 만들어낸다.
결국 부모와 자식이 친구 같을 수 있느냐는 정답을 요하지 않는다. 친구처럼 지내지 않아도 괜찮고, 친구보다 더 가까워져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 모호한 경계 속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느냐이다. 그때 가족은 사랑을 넘어서 조용히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내 편'이라는 감정이야말로, 우리가 가족에게 바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우정이 아닐까.
오늘, 내 편과 함께 장난과 우정으로 하루를 채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