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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의의 경쟁> 리뷰

by etoile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는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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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원작의 U+ 오리지널 드라마 선의의 경쟁이 U+tv 뿐만 아니라 다른 OTT에도 공개가 되었다. 기존 U+tv 접근성의 한계에 부딪혔던 것과 다르게 여러 OTT에 공개가 되면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나 역시 궁금했던 드라마였기에 U+tv 를 가입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티빙을 통해 하루 만에 정주행 했다.



1. 경쟁


제목에서 말하는 경쟁은 언뜻 보면 '수능'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두고 하는 말 같다. 하지만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는 사실 모든 캐릭터가 살기 위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본인이 생각하는 중요한 가치를 두고, 그게 있어야만 살아있음을 느끼게 되는 무언가를 두고 말이다.


어릴 때부터 늘 존재감이 없던 '우슬기'의 시점으로 드라마는 시작된다. 튀고 싶었던 나머지 유치원 원복대신 '공주 드레스'를 입고 바다에 갔다가 미아가 되면서 우슬기의 인생은 존재하기 위한 사투로 점철된다. 그리고 슬기가 선택한 방법은 공부로써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공부는 단순히 성공 수단이 아니라 생존 수단인 셈이다. 불법으로 취득한 약에 의존하는 한이 있더라도 슬기는 살기 위해 발버둥 친다.


슬기에게 아버지의 소식이 들려오고 채화여고로 전학을 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학생, 선생님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사랑받는 '유제이'를 만나게 된다. 외모, 능력, 재력 어느 하나 빼놓을 것 없는 열아홉 유제이는 만인의 동경 대상이다. 약간의 설정과다로 보이는 캐릭터이지만 뭐 어떤가 드라마인데. 이 드라마에 개연성 구멍이 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존재감이 없는 우슬기와 어디서든 눈에 띄는 유제이. 둘은 양극단에 서있다. 하지만 제이가 슬기에게 먼저 다가감으로써 둘 사이는 점점 좁혀진다. 시청자 입장에서나 슬기 입장에서 제이는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어떠한 의도가 있을 거라는 의심을 지을 수가 없지만 이상하게 제이에게 끌린다. 이건 아마 유제이를 연기한 혜리의 연기력이 8할은 차지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제이는 아버지의 약점을 잡기 위해 우슬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맞다. 하지만 처음 시작은 불순한 의도가 있었을지라도 드라마가 진행되는 내내 제이는 슬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아버지와 조용한 싸움을 한다.


최경은 유제이에 대한 열등감이 두드러지는 인물이다. 만년 2등이라는 타이틀 때문도 있지만, 머리 좋은 어머니와 다르다는 점이 최경의 열등감을 증폭시킨다. 그 열등감을 홀로 남은 교실 제이의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푸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상상에 유제이가 나타났던 것도 최경이 제이를 가장 견제한다는 걸 나타낸다. 뭘 하든 발목을 잡는 건 유제이. 최경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제이를 이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끊임없이 제이를 견제하고 이기기 위해 노력한다. 제이가 본인을 경쟁 상대로 두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예리는 기본적으로 가십을 모으고 그걸 활용해 본인이 이득을 취하는 플레이어다. 겉보기엔 외모에만 관심 있는 생각 없는 애처럼 보이지만 사실 예리야말로 정말 똑똑한 사람이 아닐까. 정보를 쥐고 그걸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대담하게 유제이 아버지에게 딜을 거는 것만 봐도 보통은 아니다. 예리가 이러한 성격을 갖게 된 건 어릴 때부터 '외모'가 본인의 전부라고 생각하게 된 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겉모습을 치장해 본인만의 갑옷을 만든 예리는 몸무게를 재고 곧바로 토하는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강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갑옷이 깨질 위기에 처했을 때, 예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본인이 가진 정보를 팔아넘긴다. 그게 설령 본인 친구를 등쳐먹는 짓일지라도.



2. 유제이와 우슬기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둘의 관계다.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붙어 다니면서 드라마의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도록 설계가 되어있다.


슬기는 본인에게 다가오는 제이를 경계하고 의심한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잘해주는 사람은 없다.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삶의 지혜나 마찬가지다. 슬기 역시 처음엔 제이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어릴 때 존재감이 없어 부모를 잃어버린 슬기에게 '잃어버리지 않게 손 꽉 잡아'라고 말하는 제이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옥상 위, 슬기의 트라우마를 불러오는 장소에서 내민 손을 슬기는 다시 한번 잡게 된다.


제이는 문제없이 슬기를 본인의 체스판 위에 올려둔다. 새 교복을 입혀주고, 슬기를 곁에 두는 것. 슬기는 머릿속으론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제이를 믿고 싶어 졌을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의문이 들었던 장면이 있다. 둘이 최경과 주예리를 피해 옷장 속으로 숨는 장면이다. 병원에 스터디룸이 있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스터디룸 안에 있는 옷장은 너무 뜬금없다. 옷 걸어둘 곳이 필요하기도 하니 그럴 수 있다 치자. 교복을 주고 최경과 주예리의 대화를 엿듣는 장소가 스터디룸이어야 했기 때문에 연출적으로 옷장이 필요했던 걸까. 그렇다면 왜 옷장이어야 했을까. 그것도 노란색 옷장 말이다. LGBT 맥락에서 '벽장(closet)'은 비밀, 사회적 압박을 뜻한다. 벽장 속에 있다는 건 본인의 정체성을 숨기고 공개하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니 둘이 함께 옷장 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서로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을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옷장이 슬기의 상징 색깔로 분류되는 노란색인 것을 보았을 때 제이가 슬기의 마음 속에 들어왔다는 걸 표현한 게 아닐까.


제이의 집에서 자게 된 슬기는 제이와 키스하는 꿈을 꾸게 된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다. 말로써 하지 않아도, 슬기가 사실 제이에게 끌리고 있다는 걸 세련되게 표현한다. 하지만 슬기가 제이의 핸드폰을 보게 되면서 둘의 관계에는 변화가 생긴다.


제이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 그건 바로 본인도 체스판 위의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슬기가 일부러 제이를 떠보고, 제 에세이를 복사해 넣어놓는다. 그리고 제이 핸드폰에 저장된 이름을 확인하는 것으로 제이가 숨겨둔 것이 무엇인지 간파한다. 이때, 제이의 주도권이 처음으로 흔들린다. 아마 제이의 인생에서 슬기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과거가 부끄럽지 않다고 말하는 슬기의 솔직함은 늘 마음을 숨겼던 제이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제이는 슬기가 경멸의 시선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슬기의 곁을 맴돈다.



3. 그래서 유제이는 무슨 마음인데?


유제이의 아버지 '유태준'은 소시오패스 기질이 드러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닮은 게 유제이다. 유제이 역시 사람 마음을 공감하지 못하는 면이 종종 드러난다. 가령 슬기 아버지를 두고 위로한답시고 슬기 아버지의 소문을 말한다는 점이나, 슬기가 불쌍하다고 해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을 하는 점이 그렇다.


슬기가 진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제이의 행보는 의심스럽다. 또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건지 시청자도, 슬기도 계속해서 의심하게 만든다. 대체 제이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 건지 알 길이 없다.


오프닝에서 사용되는 스크래치 아트에 주목해 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어릴 때 한 번쯤 해봤을 스크래치는 기본적으로 무지개 색으로 밑바탕을 채우고 그 위에 검은색으로 덮는다. 그리고 그걸 긁어내면 알록달록한 무지개 색이 나온다. 오프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연필로 스크래치를 긁어내거나 긁어낸 글자 위에 다시 검은색 크레파스로 덮는 것. 드라마에서 최경이 슬기의 새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낼 때도 스크래치를 사용하는데 이건 '진실'을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제이의 마음은 이러한 스크래치 아트 같다. 온통 까매서 속을 알 수 없지만, 긁어내면 무지개가 나온다. 마지막화를 다 보고 나면 알게 된다.


제이가 내내 숨겨온 마음은 슬기에 대한 사랑이다.


슬기에게 건넨 약은 사실 비타민이었고, 슬기 대신 수능 원서를 접수한다. 계속해서 슬기를 밀어내던 제이는 슬기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어쩌면 본인이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했던 제이의 계획은 슬기 때문에 사는 방향으로 변한다. 죽는 게 두렵지 않던 제이에게 두려움을 심어준 것은 슬기의 존재다. 유제이에게 우슬기는 그만큼 존재감이 큰 것이다.


조금 늦을지라도 약속은 지킨다는 유제이는 정말 그 약속을 지킨다. 자신이 있는 곳의 사진과 신발을 선물하면서. 신발 선물하면 도망갈까 봐 선물하지 않던 과거와 다르게, 그 신발을 신고 제게로 도망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화의 오프닝은 이전 회차와 다르게 알록달록한 배경에 흰색 크레파스로 '선의의 경쟁' 타이틀을 써 내려가면서 시작한다. 이 말은 이제 더는 제이가 본인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걸 표현한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마음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랑이다.


이 드라마의 장르는 스릴러가 아니다. 아주 잘 짜인 로맨스다.



4. 총평


사실 한국에서 이런 드라마가 이런 퀄리티로 나왔다는 게 믿을 수 없다. 퀴어베이팅이 일상인 컨텐츠를 보다가 결말까지 완벽한 드라마를 보니 얼떨떨하다. 출연진의 연기, 특히 제이 역할의 혜리는 기존 덕선이의 이미지가 하나도 생각 안 날정도로 제이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이런 얼굴이 있다고 싶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슬기, 최경, 주예리 역할을 한 배우들 역시 튀는 부분 하나 없이 그 역할을 알맞게 소화한 게 보인다. 연출 역시 너무 세련됐다. 특히 물을 활용한 연출 6화 엔딩은 최고의 엔딩이 아닐까. 연출자들이 공을 들인게 보인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약간의 개연성? 수술방에서 가운도 안 입고 수술한다든가, 고등학생이 수술 집도하는 부분이 그렇다. 슬기가 칼에 찔려 수술방에 누워있을 때 혜리가 교복 입은 채로 들어오는데 보면서 저거 컨타 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깐 몰입이 깨졌다. 그리고 제이로 위장한 시신을 유태준이 확인하는 부분도 유태준이라면 유전자 검사 시키고도 남았을텐데 저렇게 허술해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 개연성은 충분히 눈 감을 수 있을 만큼 연출과 스토리라인이 너무 마음에 든다.


시즌 2를 염두하고 만들지 않았다는 인터뷰를 봤는데, 열린 결말로 끝난 만큼 시즌2 제작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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