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없는 섬 X아일랜드 연재 중
마크 할아버지와의 만남 후로 이곳에서 나의 삶은 완전히 변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상실감 억울함의 길을 질주하다 코너를 도니 아주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 같았다. 예전에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입버릇처럼 하시던 ‘오래 살고 볼일이구만’이 말씀이 떠오르며 나는 속으로 속삭인다.
내 안에 큰 까만 바위들이 치워지고 나니 내 속이 이렇게 크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다. 너무너무 시원하고 가벼운 이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매일 놀랍다. 마크 할아버지와는 거의 매일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낚시도 하고 할아버지가 만드시는 목재일도 구경하고 돕기도 하며 난 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나고 있다.
아빠는 아직은 표정이 예전처럼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매일 늘 그래 오셨던 것처럼 기상청에 나가시고 계신다.
아빠는 이곳에 오는 차 안에서도 배 안에서도 마치 다른 세상에 영혼을 둔 빈 껍데기인 것처럼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동안은 아빠를 바라볼 여유가 없었지만, 이제 아빠를 보니 아빠가 어쩌면 더 불쌍하고 더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아직도 아빠와 왜 우리가 여기와 없는 사람처럼 살아야 하는지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난 아빠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좋은 친구를 만나고 위로를 받고 희망이 생기기를 그 무엇보다 바라고 있다. 언제나 자상하고 똑똑하고 가장 듬직한 아빠였다.
그런 아빠도 이 상황에서는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얼마 전 같았으면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죽음의 세레나데를 그리고 있었을 터인데… 창문을 열고 차가운 맑은 공기를 맞이해 보았다.
“하~ 상쾌하다.”
예전에 엄마랑 아빠랑 엄마 생일을 맞이해서 갔던 산에서 마셨던 그 찬 공기가 느껴졌다.
‘엄마, 오늘도 좋은 날이에요 사랑해요’
아침이 한참 지난 것 같다. 오늘은 늦잠을 잤다. 이게 얼마 만에 잔 꿀잠인지..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니 기분이 좋았다. 오늘도 좋은 날이다.
아빠가 이미 일어나셨는지 아침을 차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좋은 아침이에요”
아빠는 대꾸를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손에는 어떤 종이 뭉치들을 들고 가방에 넣으셨다.
“아빠 기상청에는 아빠 말고 일하시는 분이 또 계세요?”
“한 명 더 있단다. 그게 다지.”
“아빠는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세요?”
“뭐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하늘과 바다와 바람을 관찰할 뿐이란다.”
“아빠, 아빠가 계셔서 너무 좋아요”
정적이 흐른다.. 아빠 표정이 좋다기보다는 슬퍼 보였다.
“….”
“아빠, 난 엄마가 우리를 분명 기억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믿어요”
“….”
“한동안은 엄마가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없고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나고 죽고 싶을 만큼 이 세상에 싫었는데, 이젠 상관없어요, 엄마가 어디 계시든지. 엄마에게 내가 있을 거고,”
데이비드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며,
“제 여기에는 엄마가 있어요, 그리고, 아빠도요”
아빠는 약간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지만 뭔가 그동안 보지 못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래, 아빠는 그만 기상청에 가야겠다. 이따 보자꾸나”
아빠는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꾹 누르는 소리로 대답하셨다.
“네 ~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빠는 제대도 닫히지 않은 대문을 열고 나가셨다. 손으로 얼굴을 훔치시며..
기상청에 도착해서 아무 감정 없이 정해진 루틴대로 행동하는 제임스.
제임스는 계속 속으로 생각한다.
'정부가 날 살려두고 이곳에 갇아 둔 것은 다시 쓸모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특별히 내가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시 부를 일이 있기 전까지, 날 감시 하기 위한 것이다. 그때 그 일을 거절했다면,
그날 찰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온갖 후회의 가정들이 나를 미치게 한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온통 이 생각뿐이다. 데비.. 그녀가 죽는 과정을 매일 꿈으로 꾼다. 잠을 잘 수도 없지만,
잠이 들더라도 데비가 죽는 장면을 봐야 하는 것이 더 나를 미치게 만든다. 데비…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했다. 그녀는 나 대신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제임스는 창문 앞에 펼쳐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아 있는 바다를 보며 온통 그 생각뿐이다.
“제임스, 팩스 받아야지?”
“아, 네”
매일 반복되는 팩스.. 이곳에서 그의 가장 큰 임무는 팩스를 받아서 보고일지를 써서 넘기는 것이다. 매일 같은 내용의 특별할 것 없는 보고들..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의미 없는 일이다. 그들은 그냥 감시용으로 내게 이 팩스를 주고받는다. 잉크를 바꿔야 하는 팩스인데 바꿀 잉크가 없다. 다음 드론에는 올 수도 있다고 하니, 기다려봐야겠다. 사실 상관은 없다. 내용은 거의 비슷한 것들이니..
제임스는 아직도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이 상태가 영원히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정신 차려할 이유로 데이비드가 있고. 아직 데비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생사조차 모르는 이 상황에 '난 가장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이 말을 되뇌며 무너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다. 하지만, 가족 중 가장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아침 데이빗이 했던 말은 그에게도 큰 심금을 울렸다. 어린 줄로만 알았는데 데이빗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아들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어서 별얘기를 나눠 보지도 못했다. 그것도 머릿속에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들에게 설명을 해줘야 하는 건지.
내 머릿속은 그래도 온톤 데비 생각뿐이다. 아들은 엄마가 자기 가슴 안에 있다고 하며 나를 위로까지 할 수 있는데 왜 난 아직도 이렇게 미성숙한 아이처럼 있는 걸까. 데비가 살아 있다면 누구보다 강단 있게 잘 해내고 있을 그녀이다. 나와는 다른 강한 여성이고 강한 과학자다. 정부는 그녀를 살려둘 가치가 있다.
그녀보다 훨씬 못한 나 같은 과학자도 이렇게 살려 둔 걸 보면 그녀를 죽였을 리가 없다. 그녀는 누구보다 가치 있는 과학자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래 데비가 분명 살아있을 것이다. 아들이 자신의 가슴에 엄마를 둔 것처럼, 나도 그녀를 내 가슴에 두자. 분명 살아서 만날 데비를 생각하면 저 바다 위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벌써 기분이 좋아지고 설렌다. 벅차오른다. 부정적인 생각은 한 톨도 남기지 말고 몽땅 밖으로 빼내자.
그래, 상황이 어찌 됐건 내가 머릿속에 그려둔 세상과 신념이 진짜다.
그걸 희망이라고 부른다면 내 머리와 내 가슴을 온통 그 희망으로만 채울 것이다.
그래서 어그르러 진 내 삶을 온 힘을 다해 일으켜 세우리라.
마지막 순간까지 난 데비와 내 아들을 위해
그리고 내 양심을 위해서 패배자의 모습으로 살지 않으리라.
제임스가 바라보는 창밖으로 갈매기 한 마리의 두 눈에 제임스의 얼굴에 피어오는 희망의 눈빛과 마주한다.
그 희망의 소식을 이 아일랜드 너머에 있는 세상으로 전해주러 힘찬 날갯짓을 한다. 아마 그 갈매기는 어딘가 살아 있을 거라고 믿는 그녀에게 그의 희망을 알려줄 수 있기를.
다음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