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없는 섬, X아일랜드 연재 중
오늘도 데이빗은 삐거덕 거리는 대문을 밀고 집 밖으로 나와 걷는다. 이제 제법 바람이 많이 달라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볍게 스쳐가던 공기가 이제는 소매 사이로 스며들며 살갗을 찌른다.
데이빗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조용히 걷다가 그래도 바람을 손으로 잡고 싶다는 생각에 주머니에서 손을 뺀다. 처음에 이곳을 걸을 때와는 사뭇 달리 가벼워진 그의 걸음은 나뭇잎 위를 조심스레 밟고 지나가고,
바다는 옆에서 인사하듯 부드러운 숨소리를 들려준다.
나무들은 이제 짙은 초록은 모두 물러나고, 그 자리를 노랑과 붉은 갈색이 채웠던 잎들도 많이 떨어졌다. 가지 끝에서 바스락거리는 잎사귀들이 바람에 따라 흔들리다. 하나둘씩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중 하나를 주워본다. 손바닥 위에서 바삭한 소리가 났고, 그는 괜히 웃음이 났다.
바닷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바다의 목소리도 계절을 따라 낮아졌다. 잔잔한 물결이 자갈을 훑고 지나가며 ‘괜찮다, 괜찮다’, '좋은 날이다~'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바람이 볼을 스치고, 바다는 여전히 귓가를 속삭이고, 나무들은 천천히 제 빛을 내려놓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고 세상은 말없이 바뀌고 있었고, 그 속을 조용히 혼자 걸어가고 있는 데이빗의 시간도 이곳에서 흐르고 있다. 발걸음은 어느새 마크 할아버지 집에 와있었다. 들어가 보니 할아버지는 나무판자를 만들고 계셨다. 여전히 무언가를 부지런히 만드시거나 일을 하시는 부지런한 할아버지시다.
할아버지의 권유에 따뜻한 차와 구운 감자를 먹으면서 할아버지가 하는 일을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언제 이곳에 오신 거예요?”
“글쎄다.. 내가 이곳에 온 게 가만있어보자. 내가 너보다 두세 살 적었던 시절이니 9살쯤 되었을 게다."
"와우, 정말 오래전에 이곳에 오신 거네요!"
"그렇지, 그때는 지금과는 아주 달랐지. 이곳은 내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자주 휴식을 즐기러 방문했던 곳이라고 했단다. 사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함께 한번 이곳에 온 적이 있었지만 그 후에는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단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이곳에 오신 거예요?"
"음.. 그 후에 이곳을 잊고 살던 어느 날, 나는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할아버지는 알고 계셨단다. 이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 무렵 아버지 어머니는 지금 정부 이전에 있었던 정부에서 중요한 직책들을 맡고 계셨단고 들었다.
내가 7살쯤 되었을 때부터 나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이 없어지게 되면서 할아버지댁에 가게 되었단다. 그때는 잠깐이면 될 거라 생각했었지..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어. 잠깐이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고, 그러고도 한참 더 지났을 때 어머니가 한번 오셨었고 그다음 며칠 후 아버지가 오셨었어.
그 후로 할아버지는 필요한 것들을 급히 챙기시고 어린 나에게 할아버지와 낚시하러 여행을 떠나자고 하며 이곳에 오게 되었단다."
[마크 할아버지가 떠나오던 어린 시절의 한 장면]
그 동네에 살 던 어린 여자 아이가 손에 빵을 들고 나와서 맛있게 먹으며 지나가는 어린 마크에게 자랑을 한다.
“마크 오빠, 나 봐라~ 나 빵 먹는다~”
그리고 그 집 열린 대문 틈으로 보니, 서너 사람이 까만색 차림으로 앉아있고 슬피 울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마크! 어여 가자꾸나”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한 자동차 문을 열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신다.
“오빠, 우리 엄마랑 아빠 죽었대. 그래서 나 이거 먹는 거야.”
히힛 웃으며 사라지는 여자 아이를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으니 할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신다.
“마크~ 서두르자”
그때서야 정신이 돌아온 나는 뛰어가서 할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떠났다. 그렇게 차를 타고 배를 타고 이곳에 오게 되었고.. 한동안 어디선가 터지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기도 하고 하늘에 전투기가 훅 날아다니는 소리가 나기도 하고 그랬던 기억으로 지냈지만, 마크는 언제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오기만을 자기가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다렸다..
"나는 정말 낚시만 끝나면 갈 줄 알았었지. 순진했었지.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지. 무언가. 일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은 있었지만,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사실 제대로 알 수 있지는 않았단다. 그 후에 정부가 바뀌었고 할아버지와 나는 이곳이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머물러 있었다.
할아버지도 나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지. 하지만 그렇지 않았단다. 할아버지는 매일 라디오를 끼고 살았어. 그게 유일한 이곳과 바깥의 연결고리였지..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소식도 없었고, 할아버지와 나는 이곳에서 자생하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지금도 정부가 가져다주는 음식들에 의지 하지 않고도 이렇게 내가 길러 먹을 수 있는 채소와 낚시해서 먹는 물고기들로 살 수 있게 된 거란다.
시간이 흘러, 내가 너보다 서너살 많았을 때였는데, 그때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단다. 정부가 보낸 사람들이었지, 여기 살다가 다시 정부가 데려가기도 하고, 사람들이 왔다 가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금기사항이라고 했다. 지켜지지 않으면 그 사람들도 없어지기 때문에 아는 사람은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단다.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정부에서는 은혜를 베푼다면서 학교도 지어주고 병원도 지어주고 사람들이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주기 시작했어. 할아버지말로는 정부가 어떤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이곳을 군사 거점으로 사용하려는 것이라고 하셨고, 이곳에 온 사람들은 그래도 그전보다는 많은 음식들을 배급받을 수 있고 또 아이들에게 학교생활이 가능케 된 상황을 꽤나 기뻐하는 것 같았단다.
그렇게 5년 정도는 마치 예전 살던 풍경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었단다. 아이쿠.. 내가 말이 너무 길었구나. 벌써 오래된 이야기지 까마득한 것 같지만 아직도 생생하다니”
“할아버지 너무 재밌게 들었어요. 지금 모습이랑 너무 달라서 믿기지가 않네요.”
“그렇지, 그때 한 때는 그랬단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지. 어이쿠, 더 늦기 전에 어서 집에 가야겠구나. 여기 물고기 가지고 가는 것 잊지 말거라.”
“네, 할아버지, 내일 봐요.”
다음 날도 아침을 먹자마자, 할아버지댁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매일 들르는 일상이 되었다. 누군가과 얘기를 나누며 마음을 나눌 수 있음이 너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낮은 울타리를 넘어 보이는 마당에서 여전히 할아버지는 나무판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집중해서 만들고 계셨다. 마당 한편엔 마른 잎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말없이 나무를 다듬고 있었다.
손때 묻은 대패가 느릿하게 나무 위를 지나갈 때마다 얇은 나뭇결이 말려 올라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차가운 바람이 할아버지의 옆구리를 스쳐도 할아버지는 고개조차 들지 않은 채, 그저 손끝으로 나무를 어루만지며, 마치 누군가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표정으로 집중하시고 계셨다.
그래서 내가 가까이 온 것도 인지하지 못하셨다. 인기척을 이제야 느끼신 할아버지가 나무판을 움직이지 않게 붙잡아 달라고 하셔서 할아버지를 잠시 도와드렸다가 잠시 들어가서 쉬자고 하셔서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 한 컵을 먼저 내 손에 쥐어주시고는 말린 찻잎을 우리신다.
"할아버지, 어제부터 만들고 계신 게 뭐예요?"
"관이란다."
"관이라면 죽은 사람을 넣는 관이요?"
"그렇단다"
"그래서 크기가 꽤 컸군요. 몰랐어요. 할아버지가 만들고 계신 것이 관인줄은... 어른이 돌아가신 건가요?"
"그렇단다.."
“할아버지, 이 관에 들어갈 사람을 아세요?”
“알지.. 오늘처럼 아는 사람의 관을 만들 때면 계속 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단다.”
“누구신지 여쭤봐도 돼요? 저는 여기 온 지 얼마 안돼서 그런지 아무 소식을 모르겠어요. 알려주셔도 누군지 모르겠지만요..”
“안센이라는 남성인데, 젊은 시절에는 꿈도 있고 용기도 있던 좋은 사람이었단다…”
“그러면 그분은 좋은 삶을 살다가 돌아가셨겠네요?”
“글쎄다.. 누구도 어떤 사람의 인생에 대해 판단할 수는 없다만, 참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
할아버지가 말을 멈추시고 한숨을 깊게 한번 몰어 쉬신다.
“다만, 뭐요? 할아버지?”
“다만, 그가 포기하지 말았다면 말이다.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런 생각이 내내 들더구나. 참 영리하고 멋진 사람이었거든.”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았나요? 안 멋진 사람으로 변했나요?”
할아버지는 잠시 깊은 회상의 문앞에서 묵념하듯 기다리신 후, 조심스레 그 회상의 문을 열듯 말을 꺼내셨다.
“저번에 얘기했던 변화의 바람이 불었을 때 그 사람은 누구보다 열심이었단다. 정말 많은 일들을 앞장서서 하며 이곳을 예전처럼 좋은 곳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단다. 우리 모두 그렇게 믿었지. 하지만, 정책이 바뀌었단다. 이곳은 다시 잊혀져야 하는 곳이 되어 버렸고, 정부는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누군가의 탓으로 돌릴 곳이 필요했는데, 말했다시피, 반동분자 들라고 딱지 붙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이곳이 딱 좋았던 게지.
그래서 이곳에 다시 피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이곳은 다시 탄압의 희생양이 되어버렸단다. 그 어지러운 시기에 그의 부모가 타깃이 되어 돌아가시자, 얀센은 누구보다 크게 가진 열정과 희망을 놓아 버리게 된 것 같더구나… 너무 안타까운 일들이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 희망을 놓아 버리게 되니 그냥 죽는 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살 수밖에...”
옛날 생각이 아직도 마크 할아버지에게는 현재진행형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본적 없는 안센이라는 분은 내가 만약 희망을 잡지 않고 살았다면 금새 되어버렸을 내 모습이었을 거다.
할아버지는 지금 그는 지금 관을 만들고 있다. 한때 큰 꿈을 품었던 사람. 열정이 컸던 꿈꾸던 자.
할아버지가 정성스레 만드는 죽은 이를 위한 마지막 쉼터. 나무관을 바라보면 생각이 많아졌다.
희망이라는 것은
살아있으나 죽은거나 마찬가지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강렬한 것이지만,
희망을 놓는 순간
살아도 죽은자처럼 살게 될 것이고,
마음은 상실한채 몸은 시간의 흐름에 얹혀 가다
에너지를 소진시킬 수 있다.
이 관의 주인, 안센할아버지, 그분의 삶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뜨겁고 성실하게 살아오셨고, 그 땀과 노력은 큰 힘에 의해 물거품이 되었더라도, 그 분의 이야기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게 큰 울림과 메세지를 남기셨다.
그래서 나는 본 적 없는 그분을 기억하려 한다. “그저 그렇게 사라진 사람”이 아닌, 한때 누구보다 뜨겁게 살았던 사람으로. 좋은 흔적을 남긴 멋있는 분이라고. 비록 바라는 삶이 펼쳐지지 않았다지만, 끝까지 그 분의 시간을 살아내신 그 분을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희망을 놓치지 않게 마음을 굳게 먹게 해 주신 것도 감사하고싶다. 이제는 아픔도, 고단함도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데이빗은 그 안센이라는 분이 희망의 끈을 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듯 살다 가셨다지만, 마크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 있는 젊은 안센의 모습을 기억하고 기리고 싶었다. 그리고, 속으로 삼켜왔을 수많은 눈물의 날들도 함께. 안그러면 가는 길이 너무 외로우실 것 같았다.
10화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