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 없는 섬 X아일랜드 연재 중
새벽아침부터 구름이 많이 끼었더니 점점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비바람이 아주 거세지기 전에 안센할아버지의 관을 묻어서 다행이다. 비록 나와 마크할아버지와 두 명의 동네 어른만 모여서 치른 일이지만, 무탈하게 일을 끝내서 너무 다행이다.
날씨가 그 후 더욱 거세지더니, 오후에는 세상이 떠내려갈 정도로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천둥소리와 번개에 절로 두려움이 생길 정도였다. 하늘도 공기도 안센할아버지의 죽음을 같이 슬퍼하는 거겠지. 그래 그렇게 펑펑 울어줘야지 안센할아버지의 마지낙이 정말 마지막 같지 않을까. 이곳은 너무 쓸쓸한 곳이라 사람들의 배웅을 제대로 받지 못해 서운하실 수도 있으니 그 얼마나 고마운 날씨인가!
한편, 이런 날에는 세상이 끝나는 상상을 해본다. 이 거대한 자연의 소리와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한낮 작디작은 한 인간으로 그 가운데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작고 무력하게 느껴진다.
이 세상 속 어느 인간도 그만의 시간을 다 쓰고 이렇게 떠난다. 사는 모습은 제각기 다르지만, 모두가 그렇게 떠난다는 점은 그 누구도 비껴가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두려워할 것도 그렇게까지 걱정할 것도 없는 것 같다. 그 이후의 삶이 있다고 생각하면 또 견딜만한 세상이다. 난 사실 가느다란 정신줄 같은 거 하나를 위태롭게 붙잡고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엄마를 보고 싶다는 생각과 엄마가 과연 무사한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내 삶은 이곳에서 언제까지 지속이 되어야 하는 건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과연 내게 밝은 미래가 있을 수가 있는지 이런 생각들이 사실 나를 무너뜨리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곳의 자연과 마크할아버지 덕에 가느다란 줄이 내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줄을 조심스럽게 잡아두고 줄을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나의 생각과 나의 희망에 양식을 계속 부어주는 일이다. 오늘 이렇게 인생의 죽음의 한 장면을 보게 된 것은 또 하나의 양식을 받은 것 같다.
으르르꽝꽝~ 하늘에서 번쩍이는 번개와 천둥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니 옛날 어느 장면이 떠올랐다.
<데이빗이 에밀톤에 있는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
“데이빗, 오늘은 유치원 안 가도 되니까 오늘은 엄마랑 아빠랑 집에서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놀자~” 밖에는 엄청난 양의 비가 하늘이 구멍이 난 듯 퍼붓고 있었다. 가끔씩 째는 듯한 천둥소리가 깜짝 놀라게 했지만, 데이빗은 안전하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면서 꿀을 너무 사랑하는 노랑 곰돌이 푸우 이야기를 들으니 언제나 벌이와도 끄떡없이 꿀통에 손을 짚어 넣는 푸우가 그 큰 몸을 가졌는데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빗은 아빠와 엄마가 역할극을 해주시며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유치원보다 더 재밌는 시간.
다시 그때로 가 볼 수만 있다면…
이미 내 얼굴은 쏟아지는 비로 뒤범벅인데, 내 뺨에 막을 수 없는 뜨거운 물줄기 하나가 주르륵 그 다음은 여러 물줄기가 주체 없이 흘러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너무 그립다. 가슴이 미어지다 이젠 이러다 가슴이 찢어지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 울고 나니 가슴이 시원했지만 머리가 너무 아팠다. 이곳뿐 아니라, 지금의 모든 상황이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렸고 지난 시간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때 내 깊은 속에서,
‘시간은 중요하지 않아. 데이빗. 중요한 건 기억이야. 알지? 잊지 마.' 깊은 곳에서 나를 상기시키는 음성이 계속 올라왔다. 그러면서 뭔가 희망의 빛줄기가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신기하다. 다짐했던 희망의 생각이 이렇게 나도 모르게 무너질 것 같을 때 나를 다시 세우기 위해 올라오는구나. 그래서 사람은 어떻게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다는 건가 보다.
그래. 시간이 무슨 상관이야. 내가 눈 감고 그곳에 있는 동안은 현실이 될 수 있는거야.
‘그래~ 이제는 이 상황에 지지 않을 거야.
내가 어디에 있든 내 안에 그 기억은 계속 있잖아.
원할 때마다 그 기억을 꺼내어 생생히 느끼자.
내 기억에 있는 한, 난 언제나 어디서든 그곳에 있을 수 있어.
내가 가장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하고..’
뱃속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음성에 그렇게 깨달음으로 대답하듯 난 다시 미소가 내 얼굴에 번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곳에 오기 전 내가 누렸던 많은 일상들을 기억할 수 만 있다면 더 기억해서 그때 그 장면들을 그대로 꺼내 오기로 했다.
바람결에 실려오는 밥 냄새에도 문득 엄마가 부엌에 있는 느낌이 나고 잠이 잘 오지 않을 땐 자기 전에 내 등을 살살 만져주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엄마의 손길이 그립다. 그땐, 너무 평범해서 몰랐지만, 이제는 안다. 그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너무 그리워서, 그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다 보면 가슴이 꽉 막히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하지만, 내가 그 소중한 것을 잃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정부가 우리가족을 흩어놨어도, 가진것 다 가져갔어도 진짜 소중한 내 기억은 가져가지 못했으니.
시간은 문제가 아니다. 내가 기억하면 내가 느끼고 내가 다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엄마도 내 안에 내 옆에 그때처럼 있는 거다. 지금의 어두운 아빠가 아니라 그때의 재밌는 아빠가 있는 거야. 다시 나는 살아나는 것 같다. 그때 다짐했던 줄을 끊어지지 않게 잘 상기시켜 준 고마운 안센할아버지 배웅의 날이다. 할아버지 그곳에서 편안하시길...
내 안에 무거운 돌이 가벼운 깃털로 어느새 변해, 내 가슴과 목을 간지럼 핀다.
다음편 계속 12화 X아일랜드의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