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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자 합의와 달러가 약해진 날: 룰이 바뀐 세계 경제

이설아빠의 Global Business Story

by 이설아빠

달러의 역설, 그리고 미국의 불안


1980년대 초 미국 경제는 겉보기엔 화려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대규모 감세와 국방비 확대로 경기가 살아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불안한 균열이 있었다.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폴 볼커의 고금리 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 성공하였지만, 동시에 달러 가치를 폭등시켰다.


단 5년 만에 달러는 주요 통화 대비 50% 이상 절상되었고, 미국 상품은 비싸져 수출이 급감하였다. 반면, 일본과 서독은 달러 강세의 ‘수혜국’으로 수출 호황을 누렸다. 쇠락하는 미국 제조업과 커져가는 무역적자는 정치적 위기로 번졌다. 워싱턴의 지도자들은 결심했다. “이제 시장에만 맡겨둘 수 없다. 환율도 외교의 문제다.”

그리고 그 결심은 1985년 9월, 뉴욕 맨해튼의 한 호텔에서 역사로 남는다.


플라자 호텔에 모인 다섯 나라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 미국,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비밀리에 모였다. 세계 외환시장을 직접 움직인 최초의 ‘환율 회담’, 플라자 합의(Plaza Accord)의 막이 올랐다.


미국은 달러 약세를 유도해 수출 경쟁력을 되찾으려 했고, 일본은 거대한 대미 흑자 탓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서독은 강한 마르크의 부담에도 대서양 동맹의 균형을 택했고, 프랑스와 영국은 유럽 내 정치적 입지를 위해 자리를 함께했다. 회의의 결론은 명료했다. “달러가 너무 강하다. 조정이 필요하다.” 다섯 나라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외환시장에 동시에 개입하기로 합의하였다. 목표는 하나, 달러 약세였다.


그날 이후 시장은 요동쳤다. 달러 가치는 빠르게 떨어졌고, 엔화와 마르크화는 단기간에 20% 가까이 절상되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세계 외환시장의 전환점”이라 불렀고, 런던 파이낸셜타임스는 “정부가 처음으로 시장의 방향을 정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 성공의 그림자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라났다.


엔고의 대가, 일본의 버블


달러 약세로 미국 제조업은 숨통이 트였지만, 일본은 충격에 휘청거렸다. 갑작스러운 엔고는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무너뜨렸고,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내리고 재정을 풀었다.


그 결과, 시중의 돈은 산업이 아니라 자산시장으로 쏠렸다.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고, 도쿄 한복판의 땅값은 뉴욕 맨해튼 전체보다 비싸다는 말까지 나왔다. 닛케이 지수는 1989년 정점에 이르렀고, 거품은 마침내 1990년대 초 무너졌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플라자 합의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완화했지만, 대가로 일본 경제에 버블이라는 시한폭탄을 심었다. 단 한 나라의 정책적 필요가 전 세계 금융 질서를 흔든 셈이었다.


달러는 약해져도, 룰은 여전히 미국의 것


플라자 합의는 겉으로는 “달러의 약세 전환”이었지만, 속으로는 “미국 주도의 질서 재편”이었다. 미국은 필요할 때마다 세계 경제의 규칙을 다시 썼다.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달러를 금과 결혼시켰고, 오일쇼크 이후엔 석유를 달러로 묶었다. 그리고 플라자에서는 협상의 힘으로 환율까지 통제했다.


달러는 약해졌지만, 그 약화를 지휘한 건 미국이었다. 즉, 통화의 패권은 숫자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룰을 정할 권력’에 달려 있었다.


1985년 플라자 호텔의 합의문은 단 네 페이지였지만, 그 안에는 세계 경제의 권력 지형이 새겨져 있었다. 달러는 흔들릴 수 있지만, 그 중심에 선 미국의 영향력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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